한 해 강서중의학원江西中醫學院의 만우생萬友生교수님이 우리 북경중의대학에 강좌를 열었는데, 그가 강의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마황탕의 임상 응용에 대해 강의했었습니다. 나는 매우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분도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어떤 학생이 ‘마황탕은 임상에서 응용할 때가 거의 없어 도태되어야 마땅하니까 강의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요?’ 라고 하더군요." 이어서 만우생 교수님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 해 강서성의 한 광구鑛區 에서 유행성 감기가 널리 퍼진 적이 있었는데, 전염력이 대단해서 광부들 2/3가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 이 광산의 생산에 막대한 차질이 났습니다. 강서중의학원에서 그곳에 보내 놓은 오래 전 졸업생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양약 감기약을 주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은교산銀翹散、상국음桑菊飲을 다 썼는데도 이 환자들의 증상은 모두 더 심해질 뿐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아아, 왜 이 증상들이 아무리 봐도 마황탕증麻黄湯證같지? 오한, 발열, 전신동통, 비류청체鼻流淸涕! 그런데 우리 강서지방은 남방인데 마황탕을 써도 되나? 우리 재학 중에는 교수님이 마황탕 을 쓰시는 것을 본 적도 없잖아.'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쓰기가 겁이 나서 마황탕 한 첩을 처방하여 달인 뒤 자기 부인에게 먹였습니다. 그 때 마침 부인이 열이 펄펄 끓을 때 였던 겁니다. ' 참! 먼저 마누라한테 한 번 시험해 봐야겠네.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런 희생정신은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만일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요? 우리 이어서 이야기합시다. 마황10g을 쓰고, 계지도 10g, 그 뒤 감초5g을 쓰고, 행인은 9g정도 바로 이런 처방이었습니다. 뜻밖으로 그의 부인이 이 처방 약 한 첩을 먹고 땀을 흘리고 나더니 열이 내리고, 맥이 잦아들면서 몸이 서늘해지고 몸도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전 광구에서 이번에 이런 유행성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모두 마황탕을 먹이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무실에서 약을 달인 뒤 사람마다 한 병씩 준 뒤로 금방 이 유행성감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이 병례의 관찰보고를 논문 한편으로 써서 강서중의원으로 보냈는데, 그때가 마침 문화대혁명 때라 많은 학술지들이 간행을 중지하고 있어서 강서중의원 내부 간행물에 발표하였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만우생 교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강의에 나는 매우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우생교수님의 강의하신 내용을 정리한 글을 우리 북경 중의학원의 학보에 발표했습니다.
한 해는 내가 흑룡강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 때는 만교수님의 강의를 듣기 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의할 때 ‘마황탕 처방이 북경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아 북경중의학원의 일부 동료들이 이 처방은 도태되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인데 흑룡강 지구에서는 얼마나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라고 했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보니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대개 임상한의사였으며 이런 임상한의사들은 대다수가 현대식 학교 교육이 아닌, 사대도師帶徒 방식-도제식- 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오랫동안 임상을 해 오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때 강의했을 때 나이가 나보다 많은 분들이 많았고, 70년대인가 80년대인가 시기가 그 어름이었는데, 모두 그 곳의 명의들이었습니다. 흑룡강성 위생청에서 이 강좌를 기획한 것은 그들이 주치의사로 진급해야 하는데 모두 낙방했기 때문입니다. 주치의가 되려면 고시에 통과해야 되는데 고시문제는 통합편찬교재에서 나오지만 그들이 스승에게 도제시절에 배운 것은 의종금감醫宗金鑑이었기에 치료효과는 매우 좋았지만 진급을 할 만큼 점수를 받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省 위생청에서 이 사람들에게 보충강좌를 하여 주치의 진급시험에 통과할 수 있도록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었고, 상한론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내가 선정되어 그들을 가르치게 됐던 것이죠. 내가 처음 강의할 때 강의실은 단층이었는데, 바깥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이 사람들이 왜 왔을까? 멀리 북경에서 온 녀석이 있다고 해서 진료 받으러 온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학생-한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하루라도 이 학생들과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것첨 보였습니다.이렇듯 이 학생들은 모두 그 곳의 명의들로, 나는 그 강좌에서 그들에게 강의하면서 그들과 수많은 교류를 가짐으로써 나의 식견을 아주 많이 늘릴 수 있었습니다. 강의 뒤 이 학생들이 " 저, 학 교수님. 우리 이 지방에는 마황탕을 쓸 기회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소아폐렴 인데 여기에 수 십 년 전, 20여년 전의 기온은 지금보다 더 낮았습니다. 현재 흑룡강에서도 기온이 때로는 매우 올라갈 때가 있지만 그때는 기온이 매우 낮아 소아폐렴이 특히 많았고, 소아폐렴으로 죽는 경우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의진료소에서는 우리가 늘 재빨리 치료해서 병의 진행을 막음으로써 이 병이 더 진행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 " 당신들은 어떻게 병의 진행을 막았나요?" " 소아폐렴의 초기에 먼저 추워서 떨고 다음에 고열이 오며, 그 뒤로 무한이천無汗而喘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황탕증麻黄湯證이라서 마황탕으로 땀을 한 번 내 준 것이죠." " 마황탕을 쓰셨다 하는데 마황의 용량은 얼마나 쓰셨나요? " " 우리는 어린아이에게라도 15g은 씁니다." 그 곳에서는 한 돈을 5g으로 치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석 돈이 15g과 같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15g은 쓰죠. 마황麻黄15g, 계지桂枝 10g,감초甘草5-6g,행인杏仁10g,이게 가장 적게 쓰는 아동용량이고, 어른은 우리가 20g、30g 까지도 씁니다." 저번에 왜 여러분에게 말했었죠? 내가 그들에게 처방을 내니까 그들이 나 같은 남쪽 의사는 겁이 많아 약을 과감하게 쓰지 못한다고 웃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방 의사가 아니고 북경 의사라고 했더니 그들은 북경도 남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북경도 남방이었던 거죠. 아무튼 " 그러면 당신들은 어떻게 처방하시죠? "라고 했더니 "우리는 한 번도 3g, 6g, 9g하는 식으로 약을 써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최소 10g,15g,20g,25g,30g입니다. 우리는 백모근白茅根은 100g, 200g,300g,500g 으로 처방을 내고 황기黄芪도 그래요. 50g,100g,150g 이런 식이죠. 우리 조제실로 가 보세요." 그리고는 조제실로 데리고 갔는데 아직 환자에게 넘겨주지 않은 약이 조제대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약첩이 이렇게 크다니!’ 한 첩이 이만큼 커서 일곱 첩의 약을 쌓아놓았는데 이만한 높이더군요. 내가 조제실의 약사에게 ‘당신들 이걸 사람에게 먹으라고 주는 약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조제실의 약사가 매우 기분나빠하면서 자기네들은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지 동물을 치료하는 수의병원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내가 북경에서 수의병원을 간 적이 있는데, 말에게 먹일 약이 이만큼 양이 많았던 걸 본 적이 있었거든요. "당신들 이 많은 양을 어떻게 달이나요? " "냄비에다 달이죠." "그렇게 큰 질 냄비가 있나요?" "커다란 알루미늄 들통에 달여요." 그들은 약의 부피가 너무 커서 큰 알루미늄 들통, 큰 알루미늄 찜통에 약을 달이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마황탕이 상용하는 약이었습니다. 내가 아까 남방인 강서江西 지방의 예를 들어 마황탕이 쓸 모가 있다고 한 뒤에, 다시 동북지방인 흑룡강에서 마황탕을 늘 쓰고 있다는 예를 든 이유는 이 처방이 도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임상에서 전형적인 태양상한표실증이 아직도 존재하며, 여러분이 이런 증후와 맞닥뜨렸을 때 마황탕을 써야 합니다. 용량문제는 그 곳의 기후상황과 그 사람의 구체적인 체질에 근거하되 이 점은 꼭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황은 상한론 원문에서 석 냥이며,계지는 두 냥, 감초는 한 냥, 행인은 일흔 알로 마황, 계지, 감초의 용량비율이 3:2:1 이므로, 대체로 이런 비율로 파악하면 됩니다. 우리가 임상에서 쓸 때 보통 마황과 계지의 양을 같이 쓰기도 하지만 마황과 감초의 양을 서로 뒤집으면 안 됩니다. 만약 마황, 계지, 감초의 용량비율을 1:2:3으로 바꾼다면 땀을 나게 할 수 없으니 이 문제만은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행인 일흔 알은 껍질을 벗기고 꼭지를 떼 내면 그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 약국에서 백 알의 행인을 골라 피첨皮尖을 없앤 무게를 달아봤습니다. 한 개의 행인은 두 쪽으로 나누어지죠? 그래서 실제로는 200개의 중간 정도 크기의 행인 반쪽을 골라 재 봤던 것으로 그 무게는 40g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10개의 행인은 4g, 70개는 4곱하기 7로 28g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중경이 처방한 이 용량이 몇 번 치료할 양인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상사미, 이수구승, 선자마황, 감이승上四味, 以水九升, 先煮麻黃, 減二升’ 위 네 가지 약을 달이는데, 물 아홉 되에 먼저 마황을 넣고 2되가량을 졸여 7되로 만듭니다. 이때 장중경 시대에는 마황을 채취하자마자 썼기 때문에 신온조열辛温燥烈한 성질이 비교적 강렬하므로 먼저 달여 ‘거상말去上沫’ 위에 뜬 거품을 걷어냄으로써 그 신온조열한 부작용을 줄이려고 한 것인데, 신온조열이 너무 강하면 양기를 흔들기 쉬워 복용 후에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하여 가슴을 두근두근거리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감이승, 거상말, 납제약減二升,去上沫,內諸藥’ 두 되를 졸인 뒤 뜬 거품을 걷어내고 나머지 약을 넣습니다. ‘자취이승반煮取二升半’나머지 약을 넣고 다시 두 되 반이 되도록 달입니다. 이 두 되 반을 어떻게 먹을까요? ‘온복팔홉溫服八合’ 따뜻할 때 여덟 홉을 먹습니다. 한 번에 여덟 홉만 먹는데 한 나라 때의 한 홉은 20ml이며 한 되는 200ml이니 한 번에 여덟 홉을 마신다면 160ml를 마시는 셈으로 요즘 우리가 마시는 양과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시간이 나면 천안문 광장의 동 쪽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가 보세요. 역사박물관에는 한 나라 때의 구리로 만든 홉-합合,되-승升,말-두斗 등이 아주 많이 전시되어 있고,심지어는 큰 곡斛-휘까지 있습니다. 합(홉), 승(되),두(말), 곡(휘)는 모두 한나라 때의 부피단위인데, 홉은 너무 작아 손으로 잡을 수 없을 정도라서 긴 자루가 붙어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는 이게 한나라 때의 국자인가 했는데, 나중에 옆에 한대의 홉이라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20ml라 너무 작아서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요즘 작은 국자처럼 긴 자루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대의 되도 작아서 200ml를 담을 정도였는데, 내가 뒤에 한 대의 도량형과 고방古方의 용량을 환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어 강의하겠습니다. 이어서 방후方後-복약 후의 조치-를 봅시다. "복취미사한覆取微似汗”이라 했는데, 복취란 이불을 덮는 것입니다. 마황탕이 아무리 순전히 신온한 발한처방이라 하더라도 발한은 조금만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황탕은 발한하는 힘이 비교적 강하므로 뜨거운 죽을 먹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불수철죽不须啜粥”이라 하였고, 뒤의 “여여계지법장식餘如桂枝法將息”은 나머지는 계지탕 처방 뒤에 기재된 대로 조양調養하며,음식금기와 호리護理까지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서한상림공부동승西漢上林共府銅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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