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중의思考中醫

한의학의 학습과 연구-11

臥嘗 齋 2025. 1. 28. 10:21

3.세 가지의 문화
앞에서 이론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왜 이 문제를 강조해야 했을까? 그것은 현재가 과거와는 다르기 때문인데, 과거의 많은 명의들은 먼저 이성과정理性過程을 거쳐서 의학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감성感性으로 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감성이란 것은 매우 이상하게도 그 힘이 무척 커서 한 번 감성 동력이 제대로 발휘되면 다른 문제들은 쉽게 풀려버린다. 옛 사람들은 대개 이 감정의 길로부터 의학에 들어섰던 것이다. 장중경도 그래서 “감왕석지윤상, 상횡요지막구, 내근구고훈, 박채중방感往昔之淪喪, 傷橫夭之莫救, 乃謹求古訓, 博採衆方”-병들어 일찍 죽어가 옛 일상이 무너져 가는데도 구해낼 수가 없는 것을 애달피 여겨 옛 사람들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찾고 널리 많은 처방들을 모아들였다.-하였으며, 또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의 저자 황보밀皇甫謐이나 그 밖의 다른 의가들도 모두 비슷한 상황아래서 감성 가운데서 동력을 얻어 의학 공부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동력이 있었던가?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동력이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별 게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중의학원中醫學院에 오게 되었을까? 수능성적이 청화대나 북경대에 갈 수 없을 정도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반 고교高校에도 가지 못할 정도 였기 때문에 중의학원에 오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학제는 우리와 다르며, 중의학원은 우리 옛날 전문학교 정도의 수준이 아닌가 한다. -시험성적이 나빠 어쩔 수 없이 중의학원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경대나 청화대에 갈 수 있었는데도 중의학원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었을까? 내가 알기에는 한 사람도 없다. 모두들 이런 마음가짐으로 중의학원에 왔으니 긍정적인 감성적 동력이 생길 리가 없고 이러니 어떻게 한의학을 잘 배울 수가 있겠는가?
내 스승님께서는 여러 차례 내게 한의학은 보통 사람이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북경대나 청화대에 들어 갈 정도의 소질을 갖춘 사람이라야 겨우 배워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송 나라 때의 임억林檍, 고보형高保衡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들은 ≪중광보주황제내경소문重廣補注黃帝內經素問≫의 서문에서 “내하이지정지미지도, 전지이지하지천지인, 기불폐절, 위이행의奈何以至精至微之道, 傳之以至下至淺之人, 其不廢絶, 爲已幸矣”-지극히 정순하고 지극히 미묘한 도학이 지극히 어리석고 상스러운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니 전통이 끊어져서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지금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여 소질이 높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배우는 소질이 낮은 사람도 한의학을 잘 배우려는 마음이 없으니 전통이 끊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다면 한의학이 어떻게 이어질 것이며, 어떻게 빛날 수 있겠는가?
소질이 높은 사람들은 왜 한의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이는 환경과 크게 관계가 있다. 지금 우리가 주위에서 느끼는 것은 모두 현대문화의 기운으로, 모두 이런 하나의 문화적 관점에서 문제를 다루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감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전통에 대해서, 한의학에 대해서 유리한 동력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理性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성의 차원에서 분석하여 이 분석을 통해 전통의 감각을 찾아내므로써 감성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데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문화란 사실 다원적pluralistic으로, 어떤 하나의 표준 양식pattern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모두들 이런 하나의 양식에 습관이 되어 이러한 양식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일 뿐으로 사실은 이 현대문화 역시 한정되고 단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습관이 된 이 문화는 사실 줄여서 과학문화科學文化라고 부르는 현대과학문화現代科學文化이다. 이런 문화는 매우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현실성이 아주 강하여, 시대가 진보함에 따라 같이 발맞추어 진보하므로 나날이 새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 주위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은가? 십년전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가 이런 거대한 변화를 매우 뚜렷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자연적으로 모든 문화가 다 이처럼 양자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듯이 새로운 한 시대의 사람이 옛 사람보다 나은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되었다. 시대가 앞으로 나아가고 모든 문화도 앞으로 나아가므로 새로운 문화는 어쨌든 옛 문화보다 낫고, 낡은 것들은 오늘날의 문화보다 뒤떨어진 것이 필연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한의학을 높이 볼 것이며, 경전을 중시할 것인가?
우리는 문화의 다원성을 말했는데 그것은 문화가 겨우 위에 말했던 하나의 양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까지와 같은 이런 현대과학문화의 단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문화가 시대의 진보에 따라 진보해 가는 것이라고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문화라도 모두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예술문화를 보자. 시대가 진보함에 따라 예술이라는 이 문화도 반드시 진보하는 것일까? 전문적으로 예술연구를 해 온 것은 아니지만 얼핏 국내외의 예술 역사를 돌이켜봐도 전혀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사詩詞에서도 그러하다. 우선 당시唐詩를 보자. 당시는 격율格律 형식의 시로 당 나라 때의 몇 백년 동안 이미 발전할만큼 발전했는데 송 나라 때에 들어와 이 시가 다시 더 진보하고 다시 더 발전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옛 사람들은 시는 이미 당 나라 때에 가장 발전해서 당시를 능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송 나라 사람들은 똑똑하게도 더 이상 당시 언저리를 맴돌지 않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송사宋詞가 이렇게 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원곡元曲도 비슷한 상황 아래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시사詩詞방면을 살펴 본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어떻고, 그림에서는 어떠한가? 이들 분야에서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비엔나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신년 음악회를 열고 있는데, 그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곡들은 모두 어떤 곡목인가? 거의 모두가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父子의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연주하는 것은 그냥 기념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고, 작품의 수준이 훌륭해서인 것이다.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정상급 음악가로 대표되는 음악수준이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난다고 더 발전되어 이런 수준을 뛰어넘는 음악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모두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단계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시가詩歌이든, 이런 영역의 문화는 확실히 과학문화처럼 시간에 비례하여 발전해가는 線性linear발전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대개는 비선성적非線性的non-linear인 모습을 보인다. 하나의 정점에 다다른 뒤 몇 년, 몇 백 년이 지나 다시 하나의 정점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점이 반드시 앞선 정점보다 더 높은 경지라고 할 수는 결코 없다. 하나는 선성이고 하나는 비선성이며, 하나는 직선으로 앞을 향해 발전해 나가고 하나는 곡선을 그리며 배회徘徊한다. 이 두 문화의 차원과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앞에서 말한 두 문화 이외에도 또 하나의 특수한 문화가 있는데 그것은 고대에 형성된 약간의 문화들로 불교문화佛敎文化가 여기에 속한다. 불교문화는 기원전 400여년에 탄생했는데, 인도의 싯달타 태자 석가모니가 세운 것이다. 이 문화는 다른 문화와 많이 다른데, 특히 과학문화와는 전연 반대되는 문화로 석가모니부처는 그가 만든 이 문화가 끊임없이 발전하여 커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대신 그 학과가 세 개의 다른 단계 즉 정법시기正法時期 상법시기象法時期 말법시기末法時期를 거칠 것이라고 일반적이 아닌 방식의 예언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잠깐 전공자의 입장에서 분석하지 말기로 하자. 왜 이 특수한 학문이 이렇게 일반적인 길이 아닌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토론하기로 하자. 우리는 그냥 이 현상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밖에 도가의 문화에서나 유가의 문화에서도실제로는 불교의 그런 양식과 별로 다르지 않아 창립된 뒤로 실질적인 융성단계를 거쳐점점 쇠퇴하여 지금은 이름만 남고 실질은 사라질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문화는 다원적이어서 결코 하나의 양식 속에 한정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모두 발전이라는 눈으로 문제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 또한 반드시 사실과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여러 문화 유형 속에서 한의학은 결국 어떤 유형에 속할까? 혹 세 개의 유형을 모두 어느 정도 씩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점은 우리가 머리를 짜 내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 한의학은 적어도 과학문화라는 이 양식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으로만 한의학을 다루고 연구한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의학을 대할 때는 앞을 향해 보아야할 필요도 있고, 뒤를 되돌아 살펴야 할 필요도 있다.
  나는 늘 한의학이 어떤 문화에 속하는지 알려면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한의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살펴 볼 수가 있다. 발전하고 있나?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고등학부의 졸업생, 더 나아가 석사 혹은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한의학 실력이 우수하여 이론과 실제 치료에 모두 문제가 없고 경전을 이해하는데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혹 여러분에게는 한의학이 발전하고 있으면서 선성線性의 양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과 반대로 여러분의 한의학 실력이 별로이며 이론도 시원찮고 임상에서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특별히 경전에 대해서도 깜깜하다면 한의학이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문제꺼리로 퇴보하고 있으므로 이는 또 다른 하나의 양식이 되는 까닭에 여기서 특별히 스스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또 중요한 문제는 경전에 대한 인식과 평가인데, 강의에서 듣기만 했을 뿐으로 경전에 대해 깨달음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많으면 그에 대해 하는 말들은 모두 빈 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경전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신중히 생각한 뒤에 말하라고 권해드린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수준이 어떤지 상대방이 바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되는 인식에 대해 공자께서는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인자견지위지인, 지자견지위지지, 백성일용이부지, 고군자지도선의.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인자仁者는 이를 인仁이라 하고, 지자智者는 이를 지智라 하며, 백성들은 날마다 이 도리를 써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군자의 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라 하여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경전의 내용은 확실히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智者見智로 자기 수준에 맞추어 해석되고 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러니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요즘 경전은 선택과목으로 바뀌어 있는데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경전에서 찾을 수 있는 ‘인’, ‘지’의 성분이 충분치 못하다고 보여, 덜 중요하고 덜 필요하다고 느껴졌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밖에 경전을 선택과목으로 바꾸는 데는 설문조사의 힘이 컸다. 수백에서 많으면 천 권이 넘는 설문지를 돌려 사람들에게 ‘ ✓’나 ‘×’를 표시하도록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경전 항목에 ‘×’를 함으로써 통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전을 교육하는 의미가 크지 않다고 여긴 것으로 나왔다고 보아 선택과목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의 표준으로 보면 이런 설문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경전이 견인견지見仁見智하는 학문이어서 인자라야 인을 보고 지자라야 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니, 만약 여러분이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찌 그 속의 ‘인’과 ‘지’를 보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면 당연히 경전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이고 심지어는 선택과목으로도 넣을 필요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경전을 배우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배울 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경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서 진실을 반영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사대 문학명저文學名著를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홍루몽으로 보고 있는데, 나는 앞의 세 작품은 여러 번 읽었었다. 그런데 홍루몽은 어떤까? 매우 읽고 싶었고, 적지 않은 훌륭한 사람들이 칭찬했고 특별히 모택동이 매우 떠받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읽을 때 마다 겨우 몇 회chapter를 읽거나 많아야 십 몇 회를 읽으면 더 이상 읽어 나갈 수 없어 이 명저를 아직 한 번도 다 읽지 못했고 겨우 ‘적조조, 래거무견괘赤條條, 來去無牽掛.’-홀가분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홍루몽에서 보채寶釵가 인용했던 시의 한 구절-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만일 누가 내게 홍학紅學-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내가 앞에서 먼저 여러분에게 우리 대학의 작고하신 유명한 중의 임패상林沛湘교수를 소개하면서 현대의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서적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내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 임 선생님은 내内, 외外, 부婦, 아兒를 배우지 않고 내경만 읽었지만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의 병을 모두 산듯하게 치료해 냈다. 만약 임 교수에게 설문조사를 했다면 그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생각들 해 보시라.
  그래서 경전과 같은 이런 견인견지하는 학문에 대해서 그 의의를 묻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상을 가려서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경전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별 것이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이 경전이 별게 아니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당신이 경전에서 얻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사를 해서 갑부가 되었는데, 당신이 장사를 하면서 돈은 못 벌고 본전까지 떨어 먹었다면 당신은 당연히 장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할 것이다. 경전을 보는 시각은 사실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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