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도상수师徒相授 -스승에서 제자로
한의학은 원래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런 학문이기 때문에 확실히 현대과학과 다른 여러 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현대과학과 같은 교육방식을 한의학에 똑 같이 적용한다면 그 과정 중에서 한의학이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데, 이 잃어버린 것이 하필 전통 한의학에서 중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결국 어떤 방식이 가장 한의학에 적합한 지를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인 것이다.
(1)우로노사雨路老师를 찾아 뵙다.
한의학은 이미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학문을 전승하는데 우리가 배워야 할 가치가 있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험이 바로 사도상수师徒相授인데 내 생각에 이런 방식은 한의학이라는 특수한 학문의 전승에 비교적 유리하다.
여기에서 먼저 이야기 하나를 하겠다. 1998 년 상반기에 내가 북경에 회의 차 갔을 때 친구에게 중의 방면의 ‘고수’가 누구신지 알려달라고 했었다. 내가 고수를 찾은 이유는 그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내 스스로 나의 한의학적 성취 정도가 아직 너무 낮다고 느끼고 있었는데다 나의 스승님께서는1991년에 돌아가셔서 더 이상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 번 새로운 지방에 가게 되면 그곳의 훌륭하신 분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인데, 이런 마음은 금용金庸의 무협소설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친구는 내게 북경 중의약대학의 우로노사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는 온병溫病을 전공하신 분으로 유명하신 어떤 한의사의 첫 제자이셨던 분이다. 그 어떤 분은 우리 한의학계에서 아주 대단하셨던 분으로,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삼대가 모두 조정의 어의朝廷御医를 지내셔서 집안에서 내려오는 학문의 깊이가 매우 깊었다. 우로 노사는 매우 똑똑했던데다 열심히 공부하셔서 스승을 따른 지 3년만에 그 분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으나 그 뒤로 여러 원인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가 틀어져서 얼굴을 봐도 서로 모른 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내가 우로노사를 찾아 뵈었을 때 그는 나에게 아주 많은 학문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셨고, 나도 많은 문제를 여쭈었다. 내가 문을 나서 헤어질 때 우로노사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유노사, 한의학이란 놈을 정말 잘 배우려면 두 글자에만 주의하면 되네. 그것은 바로 ‘사전 师传’-스승의 전수-일세." 이번의 방문에서 나에게 가장 심각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우로 노사가 헤어지면서 말씀해주신 이 두 글자였다. 무엇이 “사전师传”인가? 사전은 전통적인 술어로, 바로 스승이 가르쳐주신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들과 같은 이런 교육방식 속에서 사전이 있겠는가? 사전이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요즘과 같은 교육 모식 속에서는 단지 기계적인 지식 전수만을 위한 도구로서의 선생이 있을 뿐으로 진정한 사부师父는 없다. 우로 노사와 그 어떤 한의사의 관계에 이같은 유쾌하지 못한 경력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래도 이 말씀을 내게 해 주셨는데 이것은 사부가 그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깊었던 가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우로 노사의 이 말씀이 한의학의 학습, 한의학의 전승에 관건이 되는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이 우로노사란 분은 저자가 이름을 밝히기 어려워 가명을 쓴 듯하다.(역자)
(2)사자, 인생지대보师者,人生之大宝 -스승은 인생의 커다란 축복
다음으로 나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을 모신 경험을 이야기하겠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 느낀 바를 이야기할 수 있고, 이 한의학을 끊임없이 연구해 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 이미 20여년이 되었는데, 그 세월 동안 질리지 않고 공부해 오면서 한 번도 돌이켜 보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 어떤 조류潮流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거나, 권력을 위해 공무원이 되려고 하지 않았으며, 서양의학을 좇아가는 현대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이유의 아주 많은 부분은 바로 내 스승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1983년 졸업 후 1984년 정월 8일에 스승님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님을 모시게 되었다. 스승님의 함자는 이李 양阳자 파波자로 지금 돌아가신지 10여년이 되었다. 나는 스승님을 8년 여를 모셨는데 앞의 두 해 반 동안은 같은 솥에 밥을 먹었고, 같은 방에 잠을 잤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밤새 마음을 터 놓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다. 8년간의 스승을 모셨던 삶이 나에게 한의학 이란 이 세계에서 눈을 뜨게 했는데 , 스승님이 나를 한의학의 큰 문 속으로 끌어들이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사부령진문, 수행재개인师父领进门,修行在个人。”-스승께서 학문에 들게 하시지만, 학문을 닦고 실행하는 것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왔던 분들이 몸소 겪은 뒤 한 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문은 확실히 스승께서 열어 이끌어 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문 밖에서 빙빙 돌 뿐이니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어떤 사람은 한평생 노력해도 문고리도 잡을 수 없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길을 꾸준히 계속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스승이 문을 열어주는 결정적인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 스승과 겪었던 그 과정들을 돌이켜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된 것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찾는데 만일 괴로움만 있고 즐거움이 없다면 아무도 그런 일은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학해무애고작주学海无涯苦作舟”-가없는 학문의 바다는 괴로움이란 배로만 건널 수 있다-는 한 마디 말 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 학문이란 문의 바깥에서 발을 멈출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학문에 한 번 발을 들여놓아 그 문에 들어서게 되면 결코 모두가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반은 되며, 즐거움이 괴로움보다 많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논어论语》의 처음에 바로 든 구절이:“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学而时习之,不亦说乎。”-배우고 늘 익히니 이 어찌 즐겁지 않으랴-였고, “학이시습지, 불역고호学而时习之,不亦苦乎。”가 아닌 것이다.
옛부터 말하기를 “궁학부상穷学富商”이라 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하게 되어 있고, 장사를 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배우는가? 그것은 바로 이 “불역락호不亦说乎”때문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신 상의 충족을 위한 것이며, 장사를 한다는 것은 물질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물질일까? 아니면 정신일까? 모두들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이 “불역열호不亦说乎”는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전师传”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은 당신이 이 "열说을、이 “락乐”을 찾아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다.
전통문화의 다른 영역에서도 “사전师传”의 이러한 의의는 무엇때문인지 더욱 두드러지게 이야기된다. 이것이 내가 전통문화인 한의학 영역을 배우면서 겪었던 하나의 깨달음으로 이 과정 중에서 얻었던 이런 느낌들은 여러분들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교육이래도 좋고, 전승이래도 좋은데 이들은 들 다 세 가지 방면에 의의가 있다. 하나는 지식의 전수이며, 하나는 지식의 운용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창신创新이다. 우리가 말하는 지식은 한 순간 전이라 할지라도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견식见识 즉 상식常识인 것이므로 실제로는 지나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이미 지나간 것들, 낡은 것들을 배우는 것에 싫증이 날 수 있다. 사람들은 늘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낡았다고 싫어하는 측면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당신이 만약 오래된 지식을 배우지 않는다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때 무엇을 바탕으로 할 것인가? 이 때문에 학문을 하려면 반드시 "희신이불염구喜新而不厌旧”-새로운 것을 좋아 하되 옛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논어论语》 중에 든 스승이 되는 기본조건의 하나가 바로 “온고이지신温故而知新”으로 ,“온고이지신温故而知新이라야 내가이위사乃可以为师”-옛 것을 잘 익히고 삭여 낸 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 낼 ㅉ수 있어야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라고 하였다. “고故”란 무엇인가? 고는 옛부터 있어 왔던 것이니 바로 지식이다. “신新”은?신은 바로 창조이다. 창조가 있어야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있 고 새로운 것이 있어야 즐겁다. 그래서 당신이 스승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당신이 학문을 해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이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학락学乐-학문의 즐거움이다. 학락学乐이 있으면 학문의 길에서 진실로 날로 새롭고, 나날이 새로와 당신의 학문이 깊어지고, 계속 학문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학문은 메마르고 재미없는 것이 되므로, 마음을 돌려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도록 장사를 하러 나가야 한다.
학락学乐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승님으로 부터 온다! 스승된 사람이 “온고지신温故知新”할 수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당신도 온고지신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일종의 복제cloning이다. 학문의 전승은 당연히 더욱 연구할 가치가 있는 클로닝이어야 한다.
(3)루구후泸沽湖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
내 돌아가신 스승님은 아주 대단하셨던 분이었는데, 그는 일찌기 한의학을 매우 비방하던 양의사를 도리어 한의학을 믿도록 만드신 적도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임상실력이 뛰어나셨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스승을 따른 뒤로는 선사先师의 관심과 공작은 이미 옮겨져 있었는데, 바로 아인쉬타인이 현대과학 영역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것을 완성하여 전통문화 영역에서 하나의 “통일장이론统一场论united field theory”을 세우려 하고 계셨다. 그래서 일의 중심이 임상에서 이론의 건립으로 옮겨가 있었으므로 내가 스승을 모시고는 이론 상의 훈도를 더 많이 받았고, 임상 상의 배움은 좀 부족한 편이었다. 스승께서 돌아 가신 뒤로도 나는 이론 상으로 더욱 더 나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임상상으로는 자주 생각의 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마음으로 확실히 믿지 못하여 치료효과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어떤 때는 '류력홍刘力红은 정말 귀신같아. 그렇게 안 낫던 병이 그 사람의 약 몇 첩으로 나았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어떤 때는 ' 류씨의 이론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임상에서는 그저 그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나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고, 특별히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서 먼데서 오신 일부 환자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했을 때 마음 속으로 더욱 곤혹스러웠고 미안했다. 마음 속으로 ‘또 하나의 구덩이에 빠졌구나! 다시 스승님이 이끌어주셔야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군. ’이라고 느껴졌다. 먼저번에 내가 왜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고수高手”를 찾기에 바쁜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사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1999년 8월 내가 미국 포트랜드Portland국립자연료법학원国立自然疗法学院National College of Naturopathic Medicine의 중의계 주임교수인 Heiner Fruehauf (付海呐)교수의 초청을 받아 운남과 사천의 경계에 위치한 루구후泸沽湖로 가서 중의계의 일부대학원생 및 본과 학생에게 상한론 강좌를 열었었다. 부해눌 교수는 한학자로 복단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분인데, 그 뒤 미국으로 돌아가 하바드대학의 교수로 초청받았지만 하나의 특수한 인연으로 한의학에 매료되어 하바드 대학의 교수라는 직책도 마다했던 것이다. 하바드와 같은 대학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 박사는 이런 직위도 버리고 방향을 바꾸어 한의학을 배움으로써, 교수가 될 것을 도리어 학생이 된 것이다. 이런 경력은 우리같은 원래부터 한의학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당연히 색다른 느낌을 가지게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한의학을 하게 되어 한의학을 배우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괴로워 하면서 한의학을 배운 것과 비교해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루구호에서 그들에게 십여일 동안 강의를 할 때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박사가 두 명이었고, 석사, 본과생 그리고 전혀 한의학을 한 번도 접촉하지 못했던 시인, 화가들이 몇 분있었다. 처음에는 오전에만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개인적인 일정을 꾸리도록 짜여져 있었는데, 2-3일이 지나자 그들은 오전 강의로는 성에 차지 않아 오후에도 이어서 강의해 달라고 하였다. 십여 일의 강좌가 끝난 뒤, 사람마다 모두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나를 greatman이라고 추켜세웠다. 이 분들의 칭찬으로 나는 또 다시 동양문화의 위대함을 느꼈고, 동서문화의 교류도 방법만 적당하다면 언어문화라는 이 장애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느꼈다.
이번 강좌에서 부 박사도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았다면서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의학학습 경력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고 아울러 특별히 그의 스승이신 한의사 증영수曾荣修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증영수선생님은 학교에서 배운 분이 아니라 한의학을 스스로 공부하셨던 분인데, 그 뒤 문화혁명 기간 중에 특수한 인연으로 성도成都의 명의이신 전팔미田八味선생님과 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팔미라는 이름을 들은 여러분은 아마도 정말 금용 무협소설 속에 나오는 무림고수같아서 매우 재미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전 선생님은 뛰어난 고수이신데, 무림武林이 아닌 의림醫林의 고수로 환자를 볼 때 경방经方을 잘 쓰시면서 그 약의 가짓 수가 여덟 개를 넘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전 선생님은 맥진脉诊을 아주 잘 하셨는데, 환자를 하루에 3-400명을 보셨던 탓에 병에 대해 자세히 물어 볼 시간도 없어 진맥만으로 병을 진단할 때가 많았다. 맥으로 증상을 짐작하셔서 처방을 쓰는데 치료효과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증 선생님은 전팔미를 스승으로 모신 뒤 점차로 맥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의 실천 경험과 더하여 상한론 중의 숱한 방증方证에 대한 맥상에도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게 됨으로써 그 분 역시 임상에서 맥으로만 증상을 판단하여 치료하는데도 치료효과가 다른 한의사들보다 우수했다. 내가 비록 상한론을 몇 년 너머 전공하여 이론 상으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경방经方을 임상에서 운용할 때는 자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부 박사의 이번 소개는 나를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다. 상한을 전공하면서 상한방伤寒方을 쓸 수 없다면 어떻게 상한을 전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증 노선생님의 이런 능력들은 내가 당시에 가장 먼저 갖고 싶었던 것이었으므로 부 박사에게 그의 스승님을 꼭 소개해 주십사 졸랐다. 그러자 부 박사는 루구호에서 성도로 돌아 온 뒤 나를 데리고 그의 스승을 뵈러 갔다. 만나 뵌 뒤 나는 스승으로 모시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는데, 증 선생님도 솔직한 성품으로 내가 인연이 닿는 사람이라 느끼셨고, 또 부 박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에 시원하게 나의 청구를 받아들이셨다. 2000년 11월 나는 증 스승님을 광서로 맞아들여 일주일 동안 그 분에게서 처방을 배웠다. 이 일 개월 동안의 배움은 내게 크나 큰 도움이 되었고, 먼저 이야기했던 그 구덩이도 증 스승이 이끌어 주신 덕분에 가볍게 벗어 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한의학을 배우는데 스승의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로 노사가 내게 말씀해 주신 그 두 글자는 정말 진심이 담긴 말씀이었다. 위에 말한 스승을 모셨던 과정을 거쳐 현재 나는 경방을 응용하면서 비록 진수를 완전히 깨달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처방을 쓰는 것이 편해 졌다. 병을 판단하는 것도 전과는 달라졌으며 임상치료효과로 볼 때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며칠 전 같은 직업의 한의사 한 사람을 진찰했는데, 왼쪽 관골 부위가 빨갛게 붓고 가려우면서 아픈 증상이었는데 이미 양약으로 항균치료抗菌治疗를 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런 환자가 여러분 앞에 있으면 당신은 어떻게 사고하겠는가? 붉기도 하고, 붓기도 하고, 가렵기도 하니까 아마도 반드시 청열清热,해독解毒,거풍祛风,지양止痒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거라면 나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 당시 내가 이 환자의 맥을 보니 맥을 가볍게 만져보아 만져졌지만 깔깔하여 매끄럽지가 않았는데 이것이 어떤 병일까? 이것은 아직 태양병太阳病으로, 표병表病에 땀을 철저히 내지 못해서 양기가 쌓여 막힌 때문이었던 것이다. 상한론 48조는 전문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치료원칙은 바로“갱발한즉유更发汗则愈”-다시 땀을 내면 낫는다-이다. 그래서 나는 마황계지각반탕麻黄桂枝各半汤의 원방을 썼는데 한 제-하루분-를 먹고 나서 홍종통양红肿痛痒이 2/3가 사라졌고, 두 제 만에 처음처럼 회복되었다. ‘마황계지각반탕은 원래 감기를 치료하는 처방인데, 어떻게 내 왼쪽 광대뼈가 붉게 부은데다 쓸 수 있었나요?’라고 하면서 그 환자인 한의사가 놀라면서 의심스러워 했다. 만약 전에 같았으면 나는 기껏해야 왼 쪽 광대뼈는 간肝에 속하고, 홍종红肿은 열에 속하므로 당연히 간을 사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용담사간탕龙胆泻肝汤을 썼을 것이고 마황계지각반탕을 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오늘 이 같은 진보가 있게 되고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게 된 것은 증 스승의 가르침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역시 사전师传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왜 그런가? 이것은 확실히 이 학문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학문은 확실히 현대과학처럼 널리 퍼져나가는 성질은 없는데, 특별히 기술의 응용 방면에서 더욱 널리 적용되기 어렵다. 이 학문은 중개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체 스스로를 통해서만 효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이 학문의 교육과정에 있어서 어떤 경우는 확실히 말로 전해지고 몸으로 가르쳐야만 제대로 전달된다. 모두들 생각해 보라. 이런 일종의 말로 전해지고 몸으로 가르치는 언전신교言传身教가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 일대일로 전해주는 사부가 계시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한의학은 이렇게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가 하나로 합쳐진 학문이므로 그 교육과 전승도 마땅히 이 두 부분을 모두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지금 채택하고 있는 이런 교육방식은 다만 형이하의 부분에만 적응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형이상의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까? 이 교육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전 즉 스승에서 제자로 주고 받는 그러한 옛날 방식에 따라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한의학의 교육은 이 두 가지 양식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원래 석박사 과정은 기뻐할 만한 제도로 지도교수는 사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미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 버렸다. 이에 더하여 사전师传의 경험을 가졌던 지도교수들께서 잇달아 물러나시고, 이를 완전히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어받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한의학의 진정한 사전师传의 법맥法脉이 거의 이어지지 못했다. 이들은 사전师传을 몸소 겪어 깨달을 수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 제자를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연구과정의 사람들은 석사과정이던지, 박사과정이던지 간에 지도교수를 무어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사장老板이라고 부른다!왜 사장인가? 당연히 우연이 아니고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사장과 사부는 어떻게 생각해 보더라도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역자- 중국에서는 지도교수를 라오판이라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별명으로 부를까?
전팔미선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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