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중의思考中醫

한의학의 학습과 연구-13

臥嘗 齋 2025. 1. 28. 10:24

5.현대의 경전 인식
다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관점으로 경전에 대해 세 방면으로 나누어 토론하려고 한다.
(1)보수성문제保守性問題
경전을 말하거나 전통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저절로 문화의 보수성에 관한 문제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현대 문화는 개방성開放性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경전적, 전통적 문화는 필연적으로 보수성을 띌 수밖에 없다. 중국이 왜 이렇게 낙후되었으며, 왜 근현대과학을 개발할 수 없었는지, 심지어 중국의 과학자들은 왜 노벨상을 거머쥐지 못하는지 이 모두가 중국의 문화와 관계가 있으며, 모두가 우리 문화 중의 고유한 보수적인 요인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통은 당연히 장애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 꼭 그런 것일까? 우리가 전통 문화에 대해 이런 견해를 고집한다면 우리의 문화를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도 한 분의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교포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양진녕 박사인데 어떤 좌담회 석상에서 본토의 과학자들이 왜 아직 한 사람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가에 대해 꼭 집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유교 문화의 보수성에서 받은 영향을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지목하였는데 여기에서 나는 오로지 이 유교문화의 보수성 문제를 가지고 양진녕박사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한다.
유교문화가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양 교수의 이런 관점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대표적 관점이다. 아마 열 사람에게 물으면 적어도 아홉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교문화가 과연 보수적일까? 보수적이라면 증거를 내 놓아보고, 보수적인 성격이 없다면 그 또한 증거를 내 놓아 보시라. 이런 증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당연히 공자에게서 찾아야 하고, 당연히 정통적인 유교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논어는 유교문화의 중요한 경전인데 논어의 어디에 유교문화의 보수성이 나타나 있는가? 우리가 이 점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다른 면인 개방성이 볼 수 있다.
논어의 첫 편은 ‘학이學而’로 학습방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의 문화가 보수성이 있는지 아닌지, 자기 자신만의 틀에 갇혀 있는지 아닌지 에서 매우 중요한 판단 근거는 바로 이 학습방면을 보면 된다. 학이편에서 공자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라고 가장 먼저 말하고 있다. 논어 처음의 이 가르침은 바로 학문을 배우는 세 가지 비결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비결은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인데 이 비결을 얕봐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지식은 학습해야할 뿐만 아니라 늘 복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모두들 해 보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시라! 배우고 익히면서 바로 기쁜 마음이 생기던가? 바로 즐거워지던가? ‘시습지時習之’는 복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사용의 관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경험으로 보면 학습이라는 과정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아니라면 왜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어 괴로움으로 배를 삼아 저어 가야한다.-학해무애고작주學海無涯苦作舟’라 했겠는가? 그래서 학문의 바다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왜? 별로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없으면 배우고 익히는 것은 괴로운 일로 힘만 들고 재미없는 일 뿐이니 누가 하려고 들겠는가? 개혁개방改革開放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접고 장사에 나섰던 원인도 이것이다. 장사에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책 속에서는 즐거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나 책 속의 옥녀玉女와 금옥金屋을 볼 수 있겠는가? -송 진종황제 권학문에서 인용함 富家不用買良田 부가불용매양전 書中自有千種粟 서중자유천종속 安居不用架高堂 안거불용가고당 書中自有黃金屋 서중자유황금옥 出門莫恨無人隨 출문막한무인수 書中車馬多如簇 서중거마다여족 娶妻莫恨無良媒 취처막한무량매 書中有女顔如玉 서중유여안여옥 男兒欲遂平生志 남아욕수평생지六經勤向窓前讀 육경근향창전독
그래서 학문을 늙도록 닦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이 ‘불역열호不亦說乎’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불역열호’는 “학락學樂‘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학문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어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불교에서의 ’법열法悅‘과 같다. 처음 불교에 입문한 행자行者를 왜 고행승苦行僧이라고 하는가? 이 과정이 유난히 힘들기 때문인데 즐거울 일이 전혀 없어 거의 믿는 마음 하나로만 버텨내야 한다. 이때는 엄격한 계율로 단속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이 단계를 지나면 배운 것을 써 나가면서 즐거워지고, 느낌이 와서 참된 법열이 생기는데 이 경지가 되면 이제까지와 완전히 달라진다. 다시는 믿는 마음이 사라질 염려가 없어지면서 누가 하라고 시키고 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보살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수행이 생명이 되고, 생활이 되어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이나 수행을 계속할 수가 있는지는 이 ’학락‘, 아 ’법열‘이 매우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이 첫 번째 비결은 바로 여러분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지 가져야만 하고 그래야 여러분이 학문을 해 나갈 수 있는 밑받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배우고 익힐 때 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가? 재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비결과 연관이 있다.
두 번째 비결은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이다. ‘학이’편에서의 ‘붕朋’(벗)이란 술이나 먹으면서 같이 노는 친구도, 배짱이 맞아 어울리는 친구도 아니다. 이때 말하는 친구란 학습과 관계있는, 학문에 뜻을 둔 그런 무리들이다. 옛 사람들이 “동문위붕同門爲朋, 동지위우同志爲友”라고 했는데 이 동문은 같은 스승에게 배웠다는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로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을 붕이라 부르는 것으로, 좀 더 나아가서 학문에 뜻을 둔 사람도 모두 붕이라 할 수 있다. 이 붕이 멀리서 찾아왔다고 했는데 멀리라면 요즘으로는 성(省) 밖에서 혹은 나라 밖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고, 공자 당시라면 진나라 혹은 조나라이거나 초나라, 연나라 일 수도 있고 그 외의 변두리에서 온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다면 자연히 다른 문화, 다른 학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 받는다면 매우 다행으로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의 지리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 먼 지방이 서구나 미국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의 이 두 번째 비결은 배우고 익히려면 교류를 잘 해야 하고 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옛 것만 지키고, 스스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만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공자께서는 “독학이무우獨學而無友, 즉고루이과문則孤陋而寡聞”이라고 경고하셨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비결이다.
세 번째 비결은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이다. 이 비결도 매우 중요한데, 학문을 하려면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비결은 전통학문을 하는데, 특별히 한의학 같은 이런 학문을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몇 년이던지 외로움을 견디고 진득이 버티지 못하고 금방 이름을 드러내려 안절부절 한다면 다른 학문을 하는 것이 낫다. 금융이라든지 전자라든지 하는 계통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한의학을 제대로 하려면 푹 젖어들어야 한다. 십년, 이십년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이래야 비로소 한의학을 잘 배워낼 수 있다.
학문을 하려면 가장 먼저 흥미를 느껴야 하는데, 이 학락이 바로 학문을 꾸준히 하게 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는 열어젖히고 어울려 주고받아야 하는 것으로, 스스로 닫아걸면 외롭고 뒤처지게 되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셋째는 학문에 깊이 빠져들어야 하는데 참된 학자가 되려면 반드시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모두들 생각해 보라! 이 셋에 뺄 것이 있는가? 한 조문도 뺄 수 없을 것이다. 공자가 내 놓은 이 세 비결 중 어디에서 유가문화가 보수적이라는 것을 느끼겠는가?
이상에서 우리는 도리道理를 말하고 이론理論을 따져 보았는데, 이제 아래에서는 실제 일어났던 사실에 근거하여 말해 보겠다. 모두들 동양문화는 유, 불, 도의 세 큰 덩어리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중 유와 도는 자생적 문화이지만, 불교는 완전히 밖에서 들어 온 문화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를 주도해 온 것은 유가였다. 그런데 불교문화는 어떻게 동방으로 전해졌을까? 이 이방의 문화가 전해져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교의 시조인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고, 불교를 가르친 석가모니의 출생연대도 거의 비슷하여 기원전 565년이다. 불교가 가장 먼저 중국에 전해진 때는 대략 기원전 2년인서한西漢 애제哀帝 원수元壽 첫 해로, 공자의 시대와 약 400여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때는 바로 유교문화가 매우 왕성하던 시기로서 유교문화가 주류였으며, 황제는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교육이념으로 삼았다. 이 시기는 유교문화가 판을 치던 때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한 번 그냥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자. 유교문화가 보수성이 매우 강하여 스스로 문을 닫아거는 문화였다면 불교문화와 같은 이방의 문화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을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유교문화가 개방적이며 흡수성이 매우 강한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에 보수성이 있다고 말할 건덕지가 있는가? 지금의 유교문화가 뚜렷이 보수적이라면 그것은 공자가 가르친 문화가 아니라 후세에 그 가르침을 이은 사람들이 비틀고 굽혀서 그리된 것일 텐데 이를 어찌 유교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유가를 이해하려면 공자를 이해해야만 하며 그것이 정통이다. 한의학도 이와 같아서 정통을 이으려면 경전에서부터 손을 대야하며 그래야만 잘못이 또 다른 잘못을 부르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경전을 배워야한다고 강조하는 주장의 또 다른 이유이다.
(2)고전 음악과 유행 음악
경전의 특수함과 현대와의 차별은 고전 음악과 유행 음악을 비교해 봄으로써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고전 음악과 유행가곡이 현대에 어떤 상황을 맞고 있는지 한 번 느껴 보라!
우리는 설문조사로 젊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에게까지 유행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며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 볼 수 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유행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고,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 뻔하다. 여러분은 아마도 아이돌 그룹이나 유행가 가수의 콘서트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지고 가수들이 눈만 깜박여도 미친 듯 소리지르고 날뛰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전 음악을 연주할 때는 어떤가? 상황은 매우 달라진다. 연주회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질서있게 정숙한 태도로 경청하여 매우 조용하며 기껏해야 한 곡이 끝날 때 손뼉을 쳐서 연주자를 격려한다. 이렇게 이 둘은 차이가 너무 크다.
현대의 사람들은 왜 유행 음악을 좋아하고 고전 음악은 싫어할까? 이것은 매우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런 현상을 통해 우리는 숱한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유행가는 감정을 바로 드러내어 호소한다.  애정을 노래한 유행가곡을 예로 들자면 죽도록 사랑하고, 미친 듯이 사랑하는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여러분이 어느 때 어떤 감정을 느끼든지 듣자마자 곧 사랑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음악은 어떤가? 베토벤의 월광곡처럼 조용히 들으면서 깊숙히 빠져들어 느끼지 않으면 이 곡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어렵다.
음악과 가곡은 모두 속 마음을 드러내어 감정과 생각을 나타나게 한다. 유행가곡은 비록 고전음악보다 감정과 생각을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글로는 말을 다 드러나게 쓸 수가 없고, 말로 생각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 내면의 깊은 세계와 복잡한 감정을 유행가처럼 얕고 직접적인 선율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모두들 이런 유행음악에 치우쳐 열광하는가? 이런 취향에서 우리는 현대인의 얼른 목적을 이루려는 조급하고 들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현대의 생활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이겠지만, 무엇을 하든지 빨리 결과를 보려하면서 조용히 느끼고 깨달으려하지 않는 이런 세태는 아무튼 매우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의학계에서 왜 경전과목을 줄이는 것인가? 왜 경전을 날이 갈수록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 한의계의 이런 정황은 바로 앞의 예로 잘 설명된다. 경전은 고전 음악과 같고, 현재 교과서를 포함한 현대서적들은 유행가와 같다. 경전에 담긴 내용은 현대의 교재처럼 드러나 보기만 해도 다 알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달아야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고전 음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참 맛을 보려면 그다지 쉽지 않지만 일단 그 맛을 보고 나서 그 참된 의미를 깨닫고 나면 비로소 음악의 진정한 생명력은 고전 음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한의학의 진정한 생명력도 경전 속에 존재한다.
모두들 차를 마셔 보고, 여러 인스턴트 음료수들도 마셔 보았을 텐데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다고 느끼는가? 음료수는 매우 편하게 마개만 따면 마실 수 있고, 그 맛도 금방 혀에 감긴다. 그러나 차는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가 않다. 물을 끓이고, 담궈 우려내야 하는데 특별히 다도茶道에서는 그 끓이고 우려내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울 뿐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며 분위기까지 느껴야 하니 그냥 음료수를 마시는 것 보다 무척 귀찮고 힘들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차라리 음료수를 마시게 된다. 그러나 마시고 난 뒤에 남는 은은한 맛과 마음의 평온함은 음료수들과 댈 바가 아니다. 아마도 모두들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경전을 읽는 것과 현대 교재를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차를 마시는 것과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므로 잘 생각해보고 차이를 깨달아보기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료를 마시는 마음으로 차를 보아서는 안되고, 유행가를 듣는 수준으로 고전 음악을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차를 음료처럼 마시면 차의 참된 맛을 절대로 보아 낼 수 없다.
(3)한의학개론이 내경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경전 과목이 왜 선택과목이 되어야 하는가?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아예 경전과목을 없애버리라고 하고 있다. 그 매우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한의학개론이라는 교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의학개론이 바로 내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내경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깔끔하다. 그런데 왜 한의학개론으로 내경을 갈음할 수 없는가? 완전히 갈음할 수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한의학개론이 내경에서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의학개론의 내용이 정말 내경을 다 포함하고, 더 나아가 갈음할 수가 있는 것일까? 두 개의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첫 번째는 병기病機인데, 이는 한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소문.지진요대론素問.至眞要大論에서 비롯되었다. 내경의 모든 편중에서 오직 이 한 편에서 이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지진요至眞要’하다고 하여 토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미 그 중요성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이를 한의학개론에서 보면 역시 따로 전문적인 제목을 두고 거기에 수많은 내용을 늘어놓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이 항목을 다 보고나면 양머리를 걸어놓았지만 사실은 개고기를 팔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진전한 내경의 병기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고 내경의 병기로 이름을 달았지만 내경에서 말하고 있는 병기의 풍부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여러분이 스스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중 하나이다.
  그 외에 한의학개론의 병기개념에 대한 해석도 있다. 여기에 그 원문을 인용해 보겠다. “병기, 즉질병발생, 발전여변화적기리.病機, 卽疾病發生, 發展與變化的機理.-병기는 질병이 발생하여 발전하고 변화하는 기전에 대한 이치이다.” 병기를 기리機理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글자 하나하나를 들어 연구해 보자. 병이 여기에서 질병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질병의 발생, 발전,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기機”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는 기리가 아닌 것인가? 설문해자에서도 강희자전에서도 이런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기의 원 뜻을 설문에서는 ‘주발위지기主發謂之機’라고 했다. 소뇌에서 화살이 활줄위에 놓여 있을 때 이를 쏘아 내려면 반드시 이 기를 쳐 주어야 한다. 다른 모든 사정도 이와 같아서 모두 하나의 기가 있어 이 기를 건드려야만 비로소 일이 발생하고 이 기를 쳐주지 않으면 다른 조건들이 아무리 갖추어져도 사건을 일으킬 수가 없다. 기란 바로 이런 것으로 일이 발생하는데 열쇠가 되는 가장 중요한 인소이다. 그것은 하나의 점일 뿐 평면이 아니지만 이 점을 때리면 면의 움직임이 뒤따른다. 이렇게 병기는 질병이 발생하고 발전, 변화해 가는 가장 관건적인 요인이어서, 이 관건과 기리는 분명히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의학개론과 내경의 다름을 볼 수 있다. 한의학개론으로 내경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이다.
두 번째는 “폐주기, 폐주치절 肺主氣, 肺主治節”이다. 먼저 폐주기를 보기로 하자. 한의학개론에서 이 기는 우리 몸의 기와 호흡하는 기를 가리킨다. 폐가 맡아보는 이 기가 우리 몸의 기와 호흡하는 기를 가리킨다는 것이 옳을까? 내경에서 우리가 알기로는 폐주기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폐자,기지본 肺者,氣之本”이었는데 이 글은 소문. 육절장상론 素問. 六節藏象論에 나온다. 육절장상론에서는 폐의 이런 중요한 기능을 말하기 전에 먼저 기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황제와 기백의 대화를 보기로 하자. 황제께서 물었다. “원문하위기?청부자발몽해혹언. 願聞何謂氣?請夫子發蒙解惑焉.”-무엇을 기라고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깨우쳐서 의문을 풀어주십시오.- 기백이 답한다. “차상제소비, 선사전지야. 此上帝所秘, 先師傳之也.”-이것은 먼저 임금님이 숨기시던 것으로, 스승님이 전해 주신 것입니다.- 황제가 다시 묻는다. “청수문지請遂聞之.”-모두 들려 주십시오.- 기백이 말한다. “오일위지후, 삼후위지기, 육기위지시, 사시위지세, 이각종기주치언. 五日謂之候, 三候謂之氣, 六氣謂之時, 四時謂之歲, 而各從其主治焉.”-닷새를 후라 하고, 세 후를 기라 하며, 여섯 기를 시라 하고 네 시를 세라 합니다. 이 기간마다 날씨가 다르므로 거기에 순응해야 합니다.-“ 이 문답은 매우 중요한 대화이지만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황제는 ”기가 무엇인지 너무 알고 싶으니 부자께서는 제발 어리석은 저를 깨우쳐 의문을 풀어주셔서 뚜렷이 알도록 해 주십시오.“ 이 말은 기백을 곤란하게 한다. 왜냐하면 원래 이 문제가 먼저 임금님이 귀중히 여겨 숨겨두었던 것을 그의 스승만이 전해 받은 것이라 가볍게 답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께서 물으시니 어쩔 수 없어 사실 그대로 대답을 해야만 한다. 무엇이 기인가? 닷새를 후라 하고 후 셋을 기라 하니 기는 바로 십오일로, 이 십오일의 주기를 기라고 하는 것이다. 일 년에 몇 개의 기가 있는지 여러분들이 셈해 보라! 일 년에는 스물네 개의 기가 있다. 원래 이 기가 가리키는 것은 절기節氣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지금은 잘들 모르지만 옛날 농사짓던 분들은 절기를 환하게 외우고 있고, 아직 절기를 표시해 둔 달력도 있다. 대개 2월 4일은 입춘立春이고, 다시 15일이 지나면 우수雨水, 또 15일이 지나면 경칩驚蟄으로 별 신기할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라! 옛날에는 모르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를 알면 자연의 신비 곧 천지변화의 리듬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의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정체관념(整體觀念)-전일개념全一概念-으로 자연과 사람이 같은 원리아래 움직인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다. 자연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합쳐지나? 쉽게 말하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같이 변한다는 것으로 이 변화의 리듬은 같은 보조步調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기의 개념 중에서 천지변화의 기본적인 리듬이 바로 기이며 15일에 한 번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5일에 한번 바뀌는 자연의 변화 리듬을 사람의 몸도 비슷한 보조로 변화하여 따라가므로 천인이 합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체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이런 기본 리듬에 따라 천인이 합일하도록 책임지고 맡아보는 것일까? 바로 폐인 것이다. 그래서 폐자, 기지본이란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와 호흡하는 기, 온 몸의 기는 또 무슨 관계인가? 별로 큰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에 살필 것은 폐주치절肺主治節이다. 한의학개론에서는 이 치절을 “치리(治理)와 조절(調節)라 했는데 이는 사실과 더욱 다른 것 같다. 무엇이 치절인가? 치절이란 개념은 소문.영란비전론素問.靈蘭秘典論에 나오는데 이것과 뒤에 나오는 기지본과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세 후가 하나의 기라고 했던 것은 사실 매우 구체적이고 뚜렷하지 않은 호칭으로 이를 나누어 보면 한 달에 두 개의 기가 있어 그 하나를 절기節氣, 다른 하나를 중기中氣라고 하는데 통 털어 24절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절節과 기氣가 사실 매우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절이라 함은 당연히 이 ‘절節’을 다스리는 것인데 어떻게 치리와 조절이란 해석을 할 수 있는가? 치리와 조절이라고 치자. 무엇을 치리하고 조절하는가?
앞의 “폐주기肺主氣”, “폐주치절 肺主治節”에 관련하여 우리는 약간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폐는 가슴 속에 있어 바깥은 늑골로 싸여 있는데 이 늑골은 몇 개인지 한 번 세어 보자. 왼쪽 열두 개, 오른쪽 열두 개 합해서 스물 네 대이어서 마침 24절기와 맞아 떨어지는데 이것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먼저 24절기의 변화가 있고 난 뒤 24개의 갈비뼈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24대의 갈비뼈가 생긴 다음에 24절기의 변화가 나타난 것일까?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 밖에도 절과 관절도 관련이 있다. 사람의 사지에 있는 큰 관절이 몇 개나 될까? 모두 합쳐 열두 개인데 관절마다 두 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모두 스물네 개의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면은 절기와 서로 대응되고, 한 면은 중기와 서로 대응된다. 팔 다리는 사시와 대응되고, 팔 다리 하나에 여섯 개의 관절면이 있어 ‘육기가 한 시가 된다’는 말과 맞아 떨어진다. 관절과 절기가 연관되고, 기후변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주위의 연세 드신 분들에게, 특히 관절이 아픈 분들을 살펴보면 그 분들이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기상대보다 더 정확하다. 기상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지만 그 분들이 비가 안 온다고 하면 정말 비가 오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 분들의 관절이 반응하기 때문으로 이런 반응과 기후의 변화는 거의 맞아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들은 분명히 관절을 인체가 기후를 느끼는 측정기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측정기구는 폐가 맡아본다.
폐와 절기의 이런 관계를 확실히 알고 나면 폐의 의의에 대한 인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자연과 서로 교감하여 따르게 되는 것은 실제로 “폐주기肺主氣”, “폐주치절 肺主治節”이라고 하는 폐의 역할에 거의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의학개론에서는 이 방면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만약 서둘러 한의학개론으로 내경을 갈음해 버린다면 어떤 결과를 맺을지 한 번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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