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중의思考中醫

한의학의 학습과 연구-5

臥嘗 齋 2025. 1. 28. 10:11

(2)귀납歸納과 연역演繹의 결합
전통문화는 귀납만으로 이루어졌을까? 이 점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소문. 상고천진론 素問. 上古天眞論’에 “상고지인, 기지도자, 법우음양, 화우술수 上古之人, 其知道者, 法于陰陽, 和于術數” 라고 분명히 씌어져 있다. 여기의 도를 아는 사람인 지도자 知道者는 바로 도를 얻은 사람인 득도자得道者이다. 도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밝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서의 리理는 다른 두 방면을 포함하는 것으로 하나는 음양陰陽이고 하나는 술수術數이다. 이들은 두 개의 별개의 문제이다. 음양이 나타내는 것은 귀납으로,  ‘소문.음양응상대론’에 “음양자, 천지지도야, 만물지강기, 변화지부모, 생살지본시, 신명지부야 陰陽者, 天地之道也, 萬物之綱紀, 變化之父母, 生殺之本始, 神明之府也.”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만물, 일체 사물의 변화, 생살 까지 모두 음양으로 귀결하였으니 귀납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완벽한 귀납법이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면 術數는? 술수가 나타내는 것은 미루어 풀어내는 것(推演)으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로직의 한 측면이다. 추연과 로직을 이야기하자면 반드시 수학과 열결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양 교수는 동양의 고대에는 수학이 없었으며 16~17세기에 서양학문이 들어오면서 수학의 씨가 뿌려졌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수학은 20세기에 들어 와서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는 청화대학淸華大學,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20세기 초에 수학과정을 개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 속에서는 결국 수학이 없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술수가 바로 수학에 관한 학문인 것이다. 사고전서 총목에서 술수의 정의를 정의하면서”물생유상, 상생유수, 승제추천, 무구조화지원자, 시위수학 物生有象, 象生有數, 乘除推闡, 務求造化之源者, 是謂數學” –사물에서 상이 만들어지고 상에서 수기 만들어지니 곱하고 나눔으로 미루어 보아 조화의 근원을 찾으려고 힘쓰는 것이 수학이다- 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의 수리로직 시스템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추연推演의 부분에 속한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지도자知道者가 되려면, 진정으로 전통의 이 학문을 파악하려면 음양을 파악해야 될 뿐 만 아니라 술수도 밝히 알아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전통문화는 귀납과 추연의 결합이며,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질 수 없다.
(3) 이성사고와 내증실험
전통문화에 실험이 없다는 이 문제는 양진녕 교수의 말이 반은 맞았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전통문화에서 현대의 이런 실험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의학을 예로 들면 사람 이외의 토끼나 흰 쥐 등을 가지고 한 실험은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전통문화에서도 매우 정밀하고 자세한 내증실험內證實驗은 있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내증실험과 이성사고理性思考가 결합하여 비로소 전통문화를 생산하고, 비로소 한의이론漢醫理論을   만들었다.
내증실험과 같은 이러한 문제를 또렷하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 이런 내증실험은 우리 눈 앞에 놓인 흰 쥐처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스스로의 수련을 거쳐 실현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능력을 갖게 되면 인체 밖에서 진행되는 것과 다른 각종의 실험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야기 안 할 수도 없다. 만약 전통문화가 이런 문제를 회피하게 되면 양교수와 같은 그런 방식으로 전통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의가 이론구조를 갖추지 못한 경험의학이던지, 아니면 한의의 이론이 생각만으로 이끌어 낸 결과던지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생각만 가지고 얻어진 이론을 우리가 완전히 믿고 따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한의학의 숱한 이론과 사실들이 사고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경락經絡, 혈위穴位 같은 것들이 생각만으로 이끌어 내 질 수 있을까?  어떻게 사고하여야 어떤 특정한 부위를 두고 풍지風池, 풍부風府라는 이름으로 가려 부를 수 있을까? 소양경은 이런 경로를 지나고, 또 태양경은 저런 경로를 지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나? 당신이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이런 것들을 생각만으로 지어낼 수는 없다고 본다. 아니라면 한 번 생각해 만들어내 보라! 만일 내증실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아주 치밀한 실험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통문화, 특히 한의학의 이론을 수립해나가는 과정過程에서 사고思考도 있었고 또 실험實驗도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 밖에 없다. 전통문화에는 실험이 없다라는 가설은 존재근거가 없다. 우리는 내증실험과 현대의 외증실험을 구분할 이유는 있지만 내증실험을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성사고와 정미한 실험이 전통문화의 기초이며, 이런 기초 위에 세워진 이론이기에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전통문화에서도 실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내증실험이 어떤 것인지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경락을 예로 들면 이시진李時珍이 일찍이 경락수도經絡遂道는 내시반관內視反觀한 사람이 아니면 그 경로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내시반관이 무엇일까? 내시반관이 바로 전형적인 내증실험인 것이 다. 이런 내증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경락 혈위가 모두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지만 현재의 과학실험으로는 볼 수가 없고 최신 과학기술의 수단을 동원해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전혀 믿기지가 않으니 이것이 어려운 점이다.
위에 말한 내증실험을 진행하려면 주체가 일정한 소양과 능력을 갖추어야만 하는데 우리들 자신이 이런 내증실험의 조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당신이 이런 직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과학도 직감을 필요로 한다. 아인쉬타인도 이런 직감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 직감이 없다면 과학은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나는 우리들 이 많은 사람 중에 이런 내증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다고생각한다. 다만 당신이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이 한의학을 배우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떤 사람이 내게 한의학을 배우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이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존재를 믿을 수 있는 바로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증실험이란 결국 어떤 상황일까? 양계초梁啓超의 한 마디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음이 밝은 것이 바로 천리이다.(心明便是天理)” 이 말은 양진녕교수가 강의 중에 인용했던 구절이기도 하다. 심명은 일반적인 마음으로 알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어서 이런 심명의 경지가 되려면 매우 어렵다. 심명은 사실 이미 내증실험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그런 상태이다. 심명하면 내시內視할 수 있고, 반관反觀할 수 있어 경락수도經絡遂道를 한 눈에 알 수 있으니 당신이 내증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왜 이것을 내증실험이라고 하나? 그것은 인체의 바깥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중경이 상한론의 서문중에서 태려약록胎臚藥錄이라는 책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전에는 노신경顱顖經이란? 소아의 질병을 다룬 책이 이미 있는데다, 여기에 “胎”자 하나가 더 붙었으니 당연히 소아에게 약 쓰는 것을 다룬 책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현대적인 말로 바꾸면 ‘소아과학약물개론小兒科藥物學槪論’쯤 될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사를 훑어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후한後漢이전에 전적으로 소아에 관한 약을 다룬 책이 있었을까?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도 상, 중, 하의 삼품三品으로만 나누었고, 내과內科, 외과外科, 부인과婦人科, 소아과小兒科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명대의 본초강목本草綱目도 목부木部, 초부草部, 석부石部, 수부獸部 등으로만 나누어 놓았다. 이런 상식으로 볼 때 태려약록은 소아과에 쓰는 약에 관한 책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태려약록은 과연 어떤 책일까? 여기의 胎는 胎兒가 아니라 胎息을 가리키는 것으로 태식은 태아시기의 특수한 호흡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태식상태로 들어가면 심명의 상태가 자연히 생기고, 내증의 조건도 갖추어져 이 때 내증실험실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 때는 약물에 대한 느낌이 절실하게 와 닿아 약물을 복용한 뒤에 그 기미氣味가 어떤지, 먼저는 어느 경락으로 들어가고 뒤에는 어떤 경락을 달리는지, 이런 부위에 어떤 작용을 발생하는지 이런 모든 것이 환하고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약물의 기미와 귀경歸經을 말한 것이 모두 생각만으로 추정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시험해 보아 얻어진 것이다. 그래서, 태려약록은 내증실험을 할 수 있는 조건 아래에서 약물이 체내에서 운행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일 것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전통문화, 특히 한의학 이론은 바로 이성사고理性思考와 내증실험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의학이 사고思考만 있을 뿐으로 실험實驗은 없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한의학에는 확실히 현대에서 말하는 외증실험은 없었다는 사실뿐이다.
(4) 이론의 운용
한의학이론이 생겨난 뒤로 어떻게 응용되었나? 이론의 응용에는 기술技術의 문제가 있다. 현대 과학영역은 기초학과基礎學科, 기술학과技術學科, 응용학과應用學科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기술학과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초이론과 응용 사이의 다리이자 중개仲介이다. 무엇 때문에 현대과학을 과학기술이라고도 할까? 그것은 이 둘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인데, 어떤 때는 과학이 기술을 결정하고, 어떤 때는 기술이 과학을 결정한다. 예를 들면 물질의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서 이론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이론을 돌파하기 위해서 고속도, 고에너지의 입자가속기 [particle accelerator, 粒子加速器]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은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있어서는 매우 기괴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적 의미의 기술이 빠져있어, 이론과 응용 사이에 다리가 되고 중개가 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에는 이론과 응용 사이에 엄청난 기술적 중개가 있어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모든 현대과학이 이런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의학이론이 아주 쉽게 응용되도록 하고 있다. 요즈음 양의들은 망진, 타진, 촉진, 청진으로 질병을 진단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신에 위에서 말한 이런 거대한 기술적 중개, 한 묶음의 이화학 검사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의사는? 우리는 이런 중개가 없다. 이론을 응용하고 이론가치를 실현하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느끼고 판단해야만 하니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내 생각에는 전통문화와 현대과학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현대과학에서는 이론과 응용 사이에 기술이라는 중개가 있어 이론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전통문화 특히 우리 한의학에는 이런 중개가 전혀 없었다. 이론을 응용하려면 스스로 직접 파악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겠는가?
현대과학과 같은 이런 기술과정은 순전히 과학엘리트만이 창조해 낼 수 있지만, 일단 기술이 만들어진 뒤에는 보통 기술자라도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전학삼錢學森(중국의 세계적 항공학자)이 미사일을 고안했지만 그 스스로 미사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컴퓨터 전문가가 컴퓨터를 발명한 뒤에 그 스스로 한 대 한 대 컴퓨터를 만들 필요 없이 기술이 다른 사람이 이런 과정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현대기술은 매우 편리한 것으로 우리를 도와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모두 현실화시킨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는 정수精粹가 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의 영역에서는 그렇게 편리하지가 않다. 이론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들이 상대성이론을 잘 알고 있다 해도 그렇다고 무슨 별다른 일을 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상대성이론으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시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대성이론을 알고 있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상대성이론을 너무 후진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인쉬타인이 너무 멍청한 것일까? 한의학이 맞닥뜨린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이며, 한의학이 뒤진 것은 바로 이 고리 때문일 뿐이지 이론이 정말로 뒤진 것은 결단코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볼 때 무수히 많은 엘리트들이 이 이론들을 성공적으로 운용하여 이 이론의 ‘원자탄’을 만들고, 이 이론의 ‘컴퓨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갛게 깨어 있는 머리로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맑고 또렷하게 생각한 뒤 문제가 이론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 토론을 거치고 나서도 여러분은 아직도 전통문화의 이론이 뒤졌다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계신가? 한의학은 현재 이론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이론이 임상보다 낙후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의학의 이론을 일단 접하게 되면 느낌이 있을 것이고, 받아 들이게 될 것인데, 어떻게 그 이론이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현재 우리들이 이런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면 한의학의 문제는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요즘 같은 상황들이 벌어졌을까? 이 문제는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우리들은 한의학 이론을 얼마나 깨우치고 있는가? 우리는 한의학이론을 정확하게 임상에 사용하고 있는가? 1987년 나의 스승께서 치료하셨던 혈기흉(血氣胸Hemopneumothorax) 환자가 생각난다. 이 환자는 일주일 동안 양의에게서 보존치료를 받았는데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계속 고열이 내리지 않고 호흡곤란이 있으면서 좌측 폐가 2/3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양의학적으로는 수술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환자와 그 가족들이 보존치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내 스승님에게 치료를 맡겼던 것이다. 스승께서는 진찰 후에 이는 양명병陽明病으로 양명陽明이 강하降下하지 못한 것이니 양명陽明이 잘 내려갈 수 있도록 회복시킬 방법만 찾으면 혈기흉의 문제는 바로 풀릴 수 있다고 보셨다. 그래서 옥죽玉竹120g, 진피陳皮120g, 백지白芷120g, 대조大棗120g 네 가지 약재로 이루어진 탕약을 처방하셨다. 환자는 복약 후에 많은 량의 설사를 하더니 자각증상이 빠르게 풀리기 시작했다. 나흘 째에 체온이 정상으로 내리고 치료 일주일 만에 공기와 피가 모두 흡수되어 좌측 폐가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혈기흉과 양명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완전히 깨달음과 운용 기교의 문제이지 이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전의 이론은 20세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21세기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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