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대의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의사였던 왕도王燾는 《외대비요外臺秘要》를 썼는데, 여기서는 줄여서 《외대外臺》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외대에도 상한론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상한론의 내용 말고도 요즘 우리가 보는 금궤요략 중의 내용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도가 본 상한론은 왕숙화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경로를 거쳐 전해진 상한잡병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일 천금본千金本 상한론이 왕숙화가 정리한 상한론10권 22편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왕도 외대비요에 수록된 상한론의 내용에는 우리가 오늘날 보는 금궤요략속의 내용도 있어서 상한잡병론의 또 다른 전래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두 저작 인 손사막의 천금익방과 왕도의 외대비요가 모두 우리가 오늘날 상한론을 교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참고서인 것입니다. 또 금방 내가 말했습니다만 당 대의 의관고시 제도에서 10문제나 상한론으로부터 출제되었다는 것은 상한 론이 당 대에 매우 널리 유행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상한론이 확실히 고정된 형태의 책자로 인쇄되어 반포된 것은 송宋 대 입니다. 송 대에는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이 만들어졌는데 거기의 주요한 관원은 임억林億, 손기孫奇, 고보형高保衡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병들 중에 상한이 가장 빨리 치료해야 할 병이라고 보고 가장 먼저 상한론 10권 22편을 교정하였는데, 이때부터 상한론이 비로소 정본定本 곧 고정된 책자로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맥경에서 수집해 놓긴 했지만 맥경 속에 수집되어 있었을 뿐으로 단독으로 책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손사막의 천금익방 과 왕도의 외대비요에서도 수집되어 실려 있지만 역시 단독으로 된 책자는 아닙니다. 송 대에 와서야 국가교정의서국의 임억, 손기, 고보형이 상한론을 교정, 각인하였는데, 처음 각인했을 때는 대자본大字本이었고 종이도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값이 비교적 높게 형성되어 일반 백성들은 살 수가 없었습니 다. 몇 년 뒤 그들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황제가 소자본小字本으로 만들고, 팔 때에는 공임만 받아 싸게 공급하도록 한 다음부터 일반 백성들도 사 볼 수 있었습니다. 송조宋朝의 황제는 중국전통문화의 전파와 확산에 많은 일들을 해서 의학상으로는 교정의서국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경經, 사史, 자子, 집集 각 부문을 모두 계통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황제들이 중국 전통문화의 계승과 선양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런 송판서적宋板書籍은 종이의 질이 우수하고 교정이 자세하며 활자체가 아름다워 평가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집안에 송나라때 판본의 서적이 있으면 집에 묵혀 놓지 마시고 고궁박물관이나 국가도서관으로 가지고 가세요. 아주 아주 진귀한 물건입니다. 지금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 많은 사람들이 대대로 학문을 하던 집안의 자제라고 생각되는데 한번 집에 가셔서 선장서線裝書 (고서-실로 엮음)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당연히 송 대의 상한론은 못 찾겠지 만 다른 송판의 서적이라도 엄청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어요.
산동山東의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하루는 이웃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 할머니 가 필사본(베껴 쓴 책)을 가지고 신발본을 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 다. “할머니 뭐예요?” “신발 본을 오리고 있어요.” 그 책을 집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영락대전永樂大全이었거든요. “할머니, 할머니 이거 어디서 가져 온 거예요?”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건데 우리는 대대로 신발 본 오리는데 쓰고 있어요.” “조상님이 뭐하시던 분이죠?” “우리 조상은 의화단義和團이었 어요!” 대개 의화단이 북경에 쳐들어 왔을 때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에는 영 락대전이 있었거든요. 북경에 진주했을 때 팔국연군八國聯軍도 쓸어가고, 의화단도 뺏어갔는데, 의화단은 훔쳐가고도 뭔지도 몰라 집에 돌아 온뒤 며느리에게 신발 본을 오리게 했고 그래서 대대손손 지질이 매우 좋았던 이 책으로 신발 본을 오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 초등학교 선생은 “할머니, 이걸로 신발 본을 오리면 안 돼요. 제가 이 책을 좀 볼게요. 종이가 필요하 시면 얼마든지 신발 본을 오릴 종이를 드릴 테니 이 책은 제게 주세요.”라고 하여 할머니가 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무슨 쓸 모가 있는지 몰랐던 거지요 . 그래요. 이런 사연을 거쳐 발견된 바로 이 책이 영락대전의 잔결된 수초본 手抄本입니다.
청淸 대에 육심원陸心源이란 분이 계셨는데 대 장서가藏書家로 그가 책을 모아둔 곳을 "벽송루皕宋楼"라 하였습니다. 이 백皕자는 이백二百 벽인데 왜 장서루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이는 그가 스스로 200부의 송대 판본 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송판본 하나의 가치가 어마어 마 한데 200부라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육심원이 죽을 때 그의 아들에게 이것은 우리 중국의 문화에 있어 크나큰 보배이니 네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호해라 하였지만 아들은 책보다 돈을 좋아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얼마 안 되어 일본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현재 벽송루의 장서는 모두 일본의 어떤 사찰 장경루에 있는데 다행인 것은 아주 잘 보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심원의 아들을 매국노라 하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중일문화의 교류에 일정한 업적을 남겼다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책들의 보존면에서 보면 중국에서는 늘 전쟁이 벌어졌고 중국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별로 중시하지 않았기에 일본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현재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런가요? 그러나 우리 중국학자들이 의 책을 보려면 돈을 내야 됩니다. 현재 이 책들을 보려고 내는 돈이 육심원의 아들이 받은 돈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민간에 흩어져 있는 고전들 을 너무 가볍게 여기면 큰 코 다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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