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문제는 상한잡병론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류전流傳되었는가 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상한잡병론의 연혁 沿革 및 주요판본主要板本에 관한 문제 입니다. 서기 200년대 전후에 장중경이 상한잡병론을 썼습니다. 상한잡병론의 자서自序로 볼 때 상한잡병론은 16권입니다. 우리는 왜 그 성서년대를 200년대 전후라고 말할까요? 이는 상한잡병론 바로 오늘날의 상한잡병론 자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그의 자서 중 한 토막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것으로 건안 기년이래 유미십임 기사망자 삼분유이 상한 십거기칠建安 紀年以來 猶未十稔 其死亡者 三分有二 傷寒 十居其七입니다. 그러면 그가 건안 기년이래로 십년도 안되어 라고 쓴 것으로 보면 건안 원년이 196년이므로 십년도 안 지난 시간이란 언제쯤일까요? 10년이 지났다면 그건 바로 206년이란 건데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그가 이 서문을 쓸 때라면 책을 이미 완성했을 때가 분명하므로 책을 다 쓴 시기가 200년 전후라고 추측하는 겁니다. 그가 쓴 책은 상한잡병론으로 우리가 아까 말했듯이 이 시기는 인쇄기술은 없었고, 종이 만드는 것은 서한의 채륜蔡倫이 비록 민간의 종이 만드는 기술을 모두 모아 종이를 만들기는 했지만 일반 민간에서 글을 쓸 때는 아직도 대나무 쪽竹簡이나 나무 쪽木簡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래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따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조 한조씩 기술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아마도 장중경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의 이 책은 상한잡병론 전질로 잘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장중경이 죽고나서 전란과 천재가 겹쳤고, 여기에 대쪽이나 나무쪽은 노끈으로 엮어서 간직해야 하는데 이 때의 노끈은 무명실이나 삼실이어서 십몇년 혹은 수십년이 지나면 노끈이 저절로 끊어져 버려 흩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 왕숙화王叔和가 그 스승의 상한잡병론의 남은 책을 모아 들여 순서대로 정리하였는데, 노끈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 대나무조각이 어디 있었나 하는 것을 모르게 되었으므로 다시 순서를 메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때가 서진西晉시기로 이 사람이 그 때의 태의령 왕숙화입니다. 이 왕숙화가 장중경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가계嘉溪선생이 최근에 고증한 바입니다. 수집, 정리,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집해 본 결과 16권을 전부 정리해 낼 수가 없어 10권 만을 정리해 냈고, 또 그가 정리해 낸 내용이 대개 상한병의 변증론치가 중심이었으므로 수집정리후 상한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상한론10권22편은 상한잡병론의 일부인데,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장중경으로서는 이 사실을 알 도리가 없는 일이고, 그래서 장중경의 의견을 물어볼 수도 없으니, 왕숙화가 마음대로 이름을 고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론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왕숙화가 정리한 책도 당연히 그 시기에는 출판될 수 없었습니다. 왕숙화는 또 다른 일을 해 냈는데 바로 자기의 책 맥경脈經을 저술한 것입니다. 맥경 속에는 장중경 상한론의 많은 내용을 모두 모아 수록하였지만 방약은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맥경도 우리가 상한론 원문을 교감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책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왕숙화는 상한잡병론이 전해내려 올 수 있게한 가장 큰 공로자입니다. 만일 왕숙화가 수집 정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날 한의임상의학에 기초를 다진 저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수집한 것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한잡병론을 현재까지 유전하게 한 가장 큰 공신이죠.
당唐 대에 손사막孫思邈이 천금요방千金要方을 썼는데, 일부 상한방을 수록했지만 모두 수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일찌기 천금요방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남주사 밀중경요방 부전江南駐師 密仲景要方 不傳'이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일까요? 과거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손사막이 모두 다 수집하지는 못하였으며, 그가 이렇게 큰 저술을 한 의사였지만 그가 상한론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남의 의사들이 모두 장중경의 상한론과 장중경의 요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쉽사리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의사들이 상한론을 중시하였다는 뜻으로, 또 당시의 많은 의사들이 상한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당 대에 의관고시醫官考試를 치를 때, 이는 요즘의 의사국가고시같은 건데, 당 대의 의관고시에서는 상한론고시의 점수 비율이 높았습니다. 내게 한 자료가 있는데 당 대에 설치되었던 의관고시제도 를 설명한 당회요.견팔십이의술 唐滙要.見八十二醫術이란 자료로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의학계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관리를 선발하는 것과 같이 모두 고시를 치르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즉 서기 759년부터 각종고시에서 의경방술醫經方術 10도道-의학이론과 방술을 보기위한 10문제, 본초本草 2도道- 한약 지식을 시험하는 2문제, 맥경脈經 2도道-진단을 보는 2문제, 소문素問 10도道-황제내경을 보는 10 문제, 장중경상한론張仲景 傷寒論 10도道-상한론의 비중이 내경과 같은 10문제, 제잡경방의諸雜經方醫 2도道- 후세의 약간의 잡방 두문제를 출제했다고 했습니다. 상술한 비례에서 보듯이 상한론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가졌습니다. 통칠이상류通七以上流 즉 70점 이상을 맞아야 의관으로 뽑히고, 이하방以下放 70점이 못되면 의관이 될 수 없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옛날 고시의 합격 점수가 요즘보다 10점이 높네요. 요즘 우리는 60점이면 합격이 됩니다만 당 대에서는 70점이 되어야 합격했습니다. 당 대 의관고시 중에 상한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 대에 상한론책자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이는 아직 사람들이 베낀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수초본手抄本, 즉 당 대의 약간의 수초본으로 모두 그 시절 의관고시를 보던 시절의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 있는 강제본康制本은 상한론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낸 책으로 모두 65조가 있는데 이는 상한론에서 매우 중요한 조문입니다. 그것은 당 대사람이 만들고 베낀 책으로 분명히 당시의 고시에 응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 대에 이미 고시에 상한론이 있었기 때문에 당 대에 상한론이 매우 널리 보급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사막이 천금요방에는 상한론을 수록하지 않았지만, 결코 상한론의 내용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았으며, 또 이 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천금익방千金翼方에는 상한론의 전부 내용을 실었습니다. 우리 북경중의약대학 의고문醫古文 교연실의 전초진錢超塵교수가 몇 년전 천금익방 중 상한론의 내용을 하나하나 뽑아내어 따로 소책자로 인쇄하고 당본상한론唐本傷寒論이라 이름붙였는데, 바깥의 서점에서 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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