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중의思考中醫

맺는 말

臥嘗 齋 2025. 1. 29. 17:49

이 책의 첫 머리에 나는 일찍이 여러 번 양진녕杨振宁교수를 언급하였다. 비록 양 교수께서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를 위대한 물리학자이면서 지자智者로서 존경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사형師兄이신 류방刘方이 내게 양 교수가 쓰신  《독서교학사십년 读书数学四十年》이란 책 한 권을 보내 주신 적이 있었다. 어제 우연히 그 책을 떠들어 보다가 글자들에 빽빽이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책장의 빈 곳에 책을 읽은 감상과 느낀 점을 적어 놓은 곳을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흘러 오랫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의 심정은 무척 복잡하여 지금 여러분들에게 모두 분명하게 전해 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전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좋은 책 한 권에 대해 느낀 감격으로, 이는 또 바로 나를 가르쳐 주신 고금古今과 국내외에 걸친 지식인 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독서교학사십년 读书数学四十年》읽고 느낀 심득心得의 일부분을 적어 이 책의 맺음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형식을 통해 이 책에서 받게 된 나의 감격을 나타내고, 또 이를 통해 내 졸작을 성심껏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한 조각 참된 고마움이 전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자께서 글로 벗을 만난다고 하셨다. 이 책이 하나의 끈이 되어 나와 벗들을 하나로 엮어서 이 보배로운 전통문화를 위해서, 한의학이란 이 빛나는 옥돌을 위해서 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각자의 조그만 힘이더라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란다.

1994년 8월 18일
양진녕교수는 1971년 여름에 처음으로 신중국新中国을 방문하였다. 8월 4일 오전에 장성长城을 참관하였다. 그는 나중에 강연 중에서 이 방문을 언급하였다. “이 여행에서 보았던 경치 가운데 나는 장성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장성은 너무나 대단했다. 간단하면서 단단하였다. 아름답게 아래 위로 구불거리면서 느릿하고 굳건하게 산등을 따라 오르내렸다. 때로는 멀리의 골짜기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곧 다시 나타나 마침내 또 끈질기게 높은 봉우리로 기어올랐다. 장성의 벽돌 하나하나마다 복잡했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스며들었겠는가! 그러나 그 전체 구조만 보아도, 그 힘과 기백만 보아도 우리는 그의 참된 뜻을 느낄 수 있었다. 장성은 길고 느릿하며, 단단하고 끈질기게  뻗어 있었다. 장성은 영활한 전술과 든든한 전략의 바탕이 되었다. 길고도 먼 하나의 목적은 우주에서 지구로 다가오는 손님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인류의 창작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가운데 장성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현실적이며, 사람들을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나는 줄곧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하면서 적절하게 한의학의 의의를 알려줄 묘사를 찾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찾게 되었다. 한의학은 바로 장성이다! 한의학은 인류 문명사 속의 장성으로 그 전체적 구성, 그 넘치는 힘과 기백, 그 잠작 하기조차 힘든 실제 운용을 보아야만 우리들은 비로소 그 참된 의의를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

1994년 8월 24일
양진영 교수는 1972년부터 매우 많은 장소들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1972년 7월 1일에 주은래 총리가 인민대회당 신강청新疆厅으로 양 교수를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양 교수는 총리에게 기초과학에 더 많이 관심을 쏟는 정책을 펼쳐줄 것을 희망하였다. 양 교수의 이런 건의는 우리 한의학에도 매우 적합한데 한의학은 사실 이런 기초과학 중점 정책이 더욱더 필요하다.
한의학의 기초과학은 무엇인가? 이 기초과학은 주로 한의학의 경전들이다. 당연히  《내경内经》이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한의학의 역사에서 상당히 유명한 대원례戴原礼는 어떤 사람이 그가 의학을 배운 방법과 과정을 묻자  ‘ 《소문素问》을 몸에 배도록 읽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것을 보면 대가들의 생각으로도 기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의학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한의대에서 《소문素问》을 한 번 다 읽은 사람도 이미 드문 실정이니, 몸에 배도록 자세히 여러 번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래서야 어떻게 이 학문을 연구해 나갈 수 있겠는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1994년 9월 5일
어떤 학과에 흥미를 느껴 입학할 수는 있겠지만 신념을 가져야만 이 학과 가운데서 현상을 돌파해 나갈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이 된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스스로의 신념을 확고히 하여야 하며, 여기에 더하여 전통문화에 대한 신념도 굳게 가져야 한다.

1994년 9월 6일
   동서양의 문화와 역사를 이야기하려니 ‘심경心境’이란 두 글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심心과 경境은 그 나름대로의 연계가 있어야 한다. 아니라면 둘을 같이 이어서 한 단어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둘 사이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동서東西’가 합해서 말하면 어떤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나누어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것과 같다.
‘심心’은 주체적인데, 이를 주관적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경境’은 객체적인데, 이를 객관적 환경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심경心境’을 합쳐놓으면 객관적 세계, 객관적 환경에 대한 우리의 주체의식이 만들어 내는 반응이라는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이런 구별을 알고 나면 서양에서 생긴 근현대 과학은 그 노력의 90% 이상을 ‘경境’을 바꾸는데 기울였는데, 그들 현대 과학의 대가들은 ‘경境’ 이 ‘심心’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동양의 지자智者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의 90% 이상을 ‘심心’을 바꾸는데 써 왔다. 그래서 이름난 동양의 ‘수심修心’법문法门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저명한 선종 공안禅宗公案중에 ‘차 마시러 가라!’ -흘다거! 吃荼去!-라는 것이 있다.  도를 깨치기 전에도 차를 마시고, 도를 깨친 뒤에도 차를 마시는데 마시는 것은 똑같아 ‘경境’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심心’에는 이미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변화가 생겨버렸다. 바로 이런 수심 체험修心体验이 있음으로써 지자智者들은 ‘심心’이란 특수한 것에 비하면 ‘경境’의 작용은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매우 똑똑하게 보아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경境’을 바꿈으로써 ‘심心’을 바꿔보려고 하는 것은 끝내 헛수고에 그칠 뿐일지도 모르겠다.
석가께서 임종할 때,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벗어 날 길을 찾아라” 하셨다. 스스로 해탈解脱하라는 것은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말이니 ‘심心’에 힘쓰라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경境’에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나는 불타佛陀의 말씀이 요즈음의 한의학에도 참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 십 년 사이에 한의학은 어떤 길을 걸어왔던가? 그 길은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길이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고, 지나치게 현대 과학에 기대어 스스로의 근본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수 십 년 사이에 한의학을 믿으면서 잘 배운 한의사들은 갈수록 적어지고, 양의사가 된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당시 중국은 양한방을 같이 배워 양한방을 졸업 후라도 바꿀 수 있었음(역자 주)- 의료계 밖의 사람들에게 물으면 모두들 한의학은 보물이라고 하지만, 의료계 사람들은 오히려 한의학을 하찮게 여긴다. 이래도 우리를 놀라 깨우치도록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한의학은 스스로 해탈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약 한의사마저 한의학을 철저히 이해하여 굳건하게 바로 서지 못한다면 현대과학을 어떻게 한의학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먼저 한의사가 스스로 강해져야 하며, 강해져야 비로소 현대과학과의 결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8일
독서의 즐거움
지식을 늘린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우리 영역 안의 신념을 늘린다. 이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우리들이 숭배하는 사상과 인물들을 두루 보여준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경계와 기품을 그 위인들에 가깝게 한다.
뜻하지 않게 모종의 영감을 격발하여 의문을 가졌던  한 다발의 과제를 풀게 해준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전공서적만 읽을 것이 아니라 독서의 범위를 더욱 넓혀야 할 것이다.
거리낌없이 유명인을 비판할 수 있고, 심지어는 위인들의 ‘그릇된’ 곳을 평가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 중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옛 것을 돌이켜 보고 그로써 새 것을 안다. 경전을 읽을 때 더욱 그렇다.

1996년 9월 16일
좌우左右는 한 쌍의 매우 재미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속에 대칭과 비대칭, 보수와 진보 같은 매우 중요한 이념을 포함하고 있다. 대칭성 원리로 우리는 왼 쪽으로 부터 오른 쪽이라는 존재에 이르럴 수 있으니 서북西北으로 동남东南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같은 도리로 음으로 부터 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봄여름으로 가을겨울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시간과 공간 속의 이런 완벽한 대칭성은 우리의 연구를 아주 쉽게 만들며, 이 후에 생긴 여러 학과의 건립도 모두 이 원리와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대칭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대칭이 도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소문素问》의 저자는 매우 중요한 편목인 ‘음양응상대론阴阳应象大论’ 에서 우리들에게 ‘천부족서북, 지불만동남天不足西北,地不满东南’이라고 타이르고 있다. 서북과 동남은 대칭이 되지만  ‘천부족서북, 지불만동남天不足西北,地不满东南’이므로 배대칭이 상당하다.
좌우대칭은 일체의 대칭에서 기초가 되지만 또한 비대칭의 기초도 된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좌우左右라는 문자 구조 속에서 위에서 말했던 심각한 내용을 느낄 수 있다. 좌우라는 글자는 왼쪽이 공工, 오른 쪽이 구口를 써서 구공口工이외는 같지만 구와 공은 매우 비대칭이다. 구와 공은 좌우의 비대칭성을 나타내는데 구와 공의 구별은 무엇인가? 공工은 교巧이다. 그래서 음악, 회화, 예술, 일체의 공간 조작및 공간적 요소와 관계되는 형상들은 모두 공工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구口는 어떠한가? 구口는 언言이다. 그래서 모든 언어 및 언어와 관계되는 로직은 모두 구口를 벗어날 수 없다. 공과 구의 이런 구별이 곧 좌우의 차이와 좌우의 비대칭성을 살아움직이듯 보여준다.
모두들 사람의 좌우와 대뇌의 좌우반구가 완전히 교차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왼 쪽은 실은 뇌의 오른 쪽을 말하고, 오른 쪽은 사실 뇌의 왼 쪽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왼 쪽을 말하는 것은 우뇌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되고, 오른 쪽을 말하는 것은 좌뇌의 상화을 말하는 것이 된다. 좌, 우뇌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이 구별은 공과 구에 차이에 있다. 좌뇌는 구를 맡아보고 우뇌는 공을 맡아본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좌뇌와 우뇌는 서로 다른 부분을 나누어 맡아보는데, 좌반구는 언어, 로직사고와 분석능력 등의 방면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우반구는 음악, 미술, 기하공간과 직감판단방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좌우뇌의 분업은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밝혀진 문제이다. 미국 갤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자 스페리(Roger Wolcott Sperry)가 성공적으로 대뇌 양반구의 기능 전문화라는 비밀을 밝혀내고, 양반구 기능 분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움으로써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좌우의 글자 만듦새로 부터 볼 때 적어도 2000여년 전에 이미 옛사람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통문화를 돌이켜볼 때면 우리는 하나의 매우 강렬한 이념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것이 매우완벽하다는 것이다. 대칭衬称과 비대칭非对称, 음阴과 양阳, 명明과 암暗, 색계色界와 무색계无色界, 유有와 무无 등등과 같은 이런 개념이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 대칭 가운데 비대칭이 존재하고, 비대칭 가운데 대칭이 존재한다. 비대칭이 있어서 대칭이 있고 대칭이 있음으로써 비대칭이 드러난다. 대칭과 비대칭이 실제로는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다시 명암을 보면 옛 사람들이 명물질을 이야기할 때 이미 암물질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하나의 명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의식하거나 보았을 때 동시에 이와 상대되는 암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의식하거나 보았다. 대칭에서 비대칭에 이르는, 명물질세계에서 암물질세계로 이르는 이런 인식과정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대칭성을 인식하거나 명물질을 인식한 뒤 한참동안의 과정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비대칭성을 인식하거나 비로소 암물질세계를 인식한다는 이야기는 없다. 전통적인 학문 중에는 이런 과정이 전혀 없다.
우리가 현대과학의 발전 맥락을 돌이켜볼 때 양진녕楊振宁교수와 이정도李政道교수가 우칭불수항宇称不守恒Parity Nonconservation(parity 비보존)을 만들어 냈을 때, 이는 비대칭성 원리가 발견되기 전으로 상당히 긴 시간동안 우칭수항宇称守恒Parity Conservation(parity보존)인 대칭성원리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시기 안에도 뚜렷이 비대칭성 원리에 대한 인식에 빈 곳과 잘못된 곳들이 있었다. 이런 통일된 원리에서 나온 판단은 반드시 매우 큰 일방적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또 명암물질明暗物质의 연구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과학계가 겨우 명물질만 인식하고 있었고, 암물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갑자기 명물질 외에도 암물질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 과거에는 근본적으로 의식하지도 못했던 것이 우리들이 인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런데 전통 문화의 개념 속에 현대과학의 발전 과정과 비슷한 곳이 있었으며, 비슷한 빈 곳이나 잘못된 곳이 있었던가? 전통 문화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본이다.
전통문화에서, 한의학의 이런 개념 속에서 우리는 전통한의학이 인류에 대해 이바지한 것이 질병의 치료에만 한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옛부터 의사를 셋으로 나누어 평가해 왔는데 하의下医는 치병治病하고 중의中医는 치인治人하고 상의上医는 치국治国한다고 하였다. 병을 치료한다는 뜻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사람의 심리, 신념에서부터 수양에 이르기까지 관계되는데, 그러면 나라를 치료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라를 치료한다는 것의 범위는 매우 넓을 수 밖에 없는데, 한의사로서는 한의학과 전통문화의 이런 완벽한 이론들을 발굴하여 현대의 표현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두를 세상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고 싶고, 현대과학의 눈 앞에 펼쳐놓고 싶다. 그리고 만약 현대인들이 실질적이면서 편견없는 마음으로 전통의 이런 이념들을 마주하고 온 힘을 다해 그 정수精粹를 받아들인다면 위에서 말했던 그런 개념에 있어서의 여러 빈 곳과 잘못된 곳을 상당부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전통을 사실대로 현대에 소개하여, 어떻게 전통이 여러 겹으로 전방위에 걸쳐 현대에 쓰이도록 하느냐는 것이 바로 내가 한의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중 하나이다.
   《노자老子》는 오천개의 글자를 세상에 전했지만 오래되어도 오히려 새롭고,  《상한론伤寒论》도 또한 글자수가 만개가 조금 넘는다. 그런데 나는 하나의 생각을 삼십여만개의 글자로 주절주절 늘어 놓았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한눈에 드러난다. 이렇게 여러분들의 노력과 시간을 뺏은 것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또 고시古诗한 수를 빌어 말하겠다.
  조주정전백赵州庭前柏 조주의 뜰 앞에 선 잣나무
  향암령후송香岩岭后松 향암의 고갯마루 소나무
  재래무별용栽来无别用 심어두고 바라는 마음은  
  지요인청풍只要引清风  머물다 가는 맑은 바람뿐

우리집 사람과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묵묵히 힘써주신 여러 친한 분과 벗들에게 감사드린다! 특별히 또 나의 직장인 광서중의학원에 감사드린다. 학원에서는 나에게 오랫 동안 각 방면으로 힘자라는대로 지지해 주셨는데, 이런 지지의 힘입어 순조롭게 본서를 쓰고 출판할 수 있었다. 청화대학清华大学에 방문할 때 이 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청화 수목水木의 신령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맺는다.  
                               2002년 10월 10일 오시午时 남녕南宁에서
짧은 지식으로 함부로 번역하여 원작의 의도를 다 살리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보자마자 한의사란 정체성이 사라져가는 요즘에 우리 한의학도들이 반드시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감히 시도해 보았다. 오역이 많더라도 독자분들께서 해량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좋은 글을 써 주셔서 막힌 속을 뚫어주신 류력홍 선생께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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