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중의思考中醫

한의학의 학습과 연구-4

臥嘗 齋 2025. 1. 28. 09:47

2.양진녕楊振寧 교수가 인식하는 중국문화
1999년 12월 3일 저명한 물리학자로 노벨상 수상자인 양진녕 교수가 홍콩중문대학의 초청으로 신아서원新亞書院에서  “전통문화와 과학” (원제는 중국문화와 과학임)이라는 제목의 강좌를 열었다. 이 강좌에서 양교수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중국문화의 특징을 설명했다. 양교수는 20세기 최대의 물리학자 중 한 분으로 공인된 사람으로 전통문화방면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보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점은 상당한 대표성을 가질 뿐 아니라 일정한  영향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그 강의에서 나타난 양진녕 교수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아래 몇 개 방면으로 귀결되었다.
첫째, 전통문화는 리理를 추구하지만, 현대과학은 자연규율自然規律을 추구한다.
전통문화가 추구하는 리는 결코 자연규율, 자연법칙이 아니며, 근대과학이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규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전통문화와 근(현)대과학의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전통문화가 리를 추구하고 자연규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이 리는 무엇인가? 양교수는 이 “리”를 “정신精神”이자 “경계境界”라 해석하였다. 그러면 이 정신, 경계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은 정신이나 경계가 없단 말인가?
둘째, 양교수는 전통문화에서는 귀납만 있을 뿐이고 로직의 풀어냄(연역)이 없다고 보았다.
과학체계 안에서 연구를 진행할 때에 귀납과 연역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 귀납은 많은 현상들을 하나의 인식, 하나의 정의, 하나의 이론으로 거두어들여 많은 사물들을 하나의 점, 하나의 인식 위에 모으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면 원래 현상으로 볼 때는 달라 보이던 것도 본질상으로는 비슷할 수 있다. 그래서 귀납은 사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인식이다. 로직으로 풀어내는 연역은 또 다른 중요한 방법으로 이러한 과정은 매우 엄밀하여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이 되는 것처럼 이러한 순서는 항상 그대로라야 한다. 현대과학은 귀납도 있고 연역도 있으면 연역이 그 간판이며, 전통문화에는 귀납만 있고 연역이 없어 이것이 전통과 현대를 구별하고 있는 점이라고 본 것이다.
셋째, 전통문화에는 실험이 거의 없고, 자연철학도 매우 모자란다는 것이다.
여러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의학이 자연과학이라 말하기 보다는 자연철학이라고 말해야 된다고들있다. 그런데 양교수는 강연도중에 오히려 한의학을 예로 들어 전통문화에는 자연철학이 모자란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점과 어긋난 견해이다.
현대과학의 영역에서 실험은 매우 중요하여 실험이 없으면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경험과학 부문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실험을 중요시하여,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도 박사를 관리하는 기구에는 불문률이 있어 문헌학 박사가 아니라면 모두 실험연구를 해야 했다. 내가 받은 이 박사학위는 내 지도교수님 덕분에 실험연구를 않고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나에게 매우 요행스러운 일이었다.
한의학 역사 속에 실험은 없다. 황제께서 기백에게 “당신은 음양이론을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흰 쥐를 가지고 실험해서 알아냈나요?”라고 했다는 글을 보지는 못했다. 한의학에서 기타 전통과학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인 의미의 실험은 없었다는 것은 사실상 옳다.
양교수의 전통문화에 대한 대체적 인식은 바로 위와 같았다.

3. 전통이론의 건립
양교수의 상술한 인식은 현재 사람들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가? 진정한 전통문화의 실질을 드러내었는가?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관점이 다르다. 전통문화에는 비록 허다한 곁가지들이 있지만 한의학이 가장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보므로 이제부터 한의학을 예로 들어 순서대로 나의 관점을 말해 보겠다.
(1) 무엇을 “리理”라 하는가?
지금 우리들이 인식해야 될 문제는 무엇이 “리”이냐는 것이다. 전통문화가 몽매에도 열심히 찾는 이 리가 겨우 정신과 경계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둘을 포함하는 그러한 존재인가? 먼저 문자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설문說文’에 “리理, 치옥야治玉也”라 하였다. 이른바 옥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옥을 조각하는 것이다. 옥돌을 캐낸 다음 갈고 닦아 정세하게 조각하여 우리가 바라는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나의 예술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理의 의미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옛 사람들의 눈에 가장 단단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옥이다. 옥은 왜 보기에 투명하게 맑고 매끈할까? 그 까닭은 옥의 결이 촘촘하고 매끄럽기 때문이다. 모두들 옛날에 어떤 백정이 소를 볼 때 어떻게 갈라야 할 지가 환히 보였다(포정해우,목무전우庖丁解牛, 目無全牛)는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왜일까? 소의 결을 익히 알고 있어, 한 덩이 한 덩이 근육의 방향을 모두 환히 꿰고 있어 이 결대로 소를 갈랐기에 빠르면서도 칼날도 전혀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옥의 결은 당연히 소보다 촘촘하고 단단하기 때문에 옥을 다스릴 때는 훨씬 더 세심해야 하고, 결을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런 결을 따라 갈고 닦고 조각하면 우리들이 좋아하는 예술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만약 이 결을 거슬러 조각하면 옥은 부서지고 만다. 리理의 원 뜻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가면 되는데, 저렇게 가면 안된다는 의미가 나올 수 있다. 왜냐? 여기에는 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이런 리理가 자연의 규율이 아니라면 또 어떤 것인가? 자연 규율, 자연 법칙은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거스르면 탈이 난다. 속담에도 “이치가 있으면 온 천하라도 다닐 수 있지만 이치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떼기 어렵다.(유리주편천하, 무리촌보난행有理走遍天下, 無理寸步難行)”고 하지 않던가! 리理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잘 따라가면 길이 뚫리는 그것이 바로 理이다. 사람의 이치이든지, 하늘의 이치든지, 자연의 이치든지 모두 이러하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면 자연에 적응할 수 있고, 사람의 이치에 따르면 사람 사이에서 늘 자유롭다. 그래서 理는 그냥 정신과 경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리理는 매우 실재적인 것이어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면 지나갈 수 있는데, 저렇게 가면 벽에 부딪힌다. 그러나 정신은 때로는 텅비고 어렴풋하여 움켜쥘  수가 없다.
우리 한의학에서는 더욱 이런 리, 이런 규율, 이런 법칙이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리理. 이런 규율規律, 이런 법칙法則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음양사시陰陽四時이다. 그래서 ‘소문.사기조신대론’에 “고음양사시자 만물지종시야 사생지본야 역지즉재해생 종지즉가질불기 시위득도 故陰陽四時者 萬物之終始也 死生之本也 逆之則災害生 從之則苛疾不起 是謂得道”-그러므로 음양사시는 만물의 처음과 마침이며, 죽음과 삶의 뿌리라 이를 어기면 재해가 생기고, 이를 따르면 어려운 병이 생기지 않으니 이것이 도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라 한 것이다. 여기에서 왜 득도得道라는 말을 썼을까?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문제이다. 득도라는 말을 옛사람들이 많이 썼는데, 득도하면 하늘로 오를 수 있다고 하니 하늘도 올라 갈 수 있는데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득도하는가? 이 리를 확실히 알고 이 이치에 따라 움직이면 당연히 득도할 수 있고 당연히 탄탄대로에 올라 설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주비행선이 어떻게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상대성이론이라는 이 이치를 훤히 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리理, 이 도道, 이 도리道理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모두 뜻 깊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