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이루어진 시기
《황제내경黄帝内经》은 《내경内经》이라고도 불리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책들 증 하나이며, 또한 한의학의 사대 경전 중의 으뜸이다.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붙여졌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서한 시대에 지금같은 모습이 되었으며, 작자는 한 사람이 아니고 역대의 황노학파 의학자들이 전승, 증보하면서 발전하고 창작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이는 바로 《회남자. 수무훈淮南子·修务训》에서 지적한 것처럼 “황제黄帝”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존중한다는 의미로 동양의학문화가 일찌감치 발달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일 뿐 사실 한 사람이나, 한 시대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황제내경이 이루어진 시기는 옛 사람들이 주로 세 종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선진시기先秦时期
이런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은 진대晋代의 황보밀皇甫谧 ,송대宋代의 임억林亿、고보형高保衡등이다. 이들은 황제내경과 같은 이런 위대한 과학서적은 모든 일에 통달한 성현과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저서가 틀림없다고 보았다.
전국시기战国时期
이런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은 송대宋代의 소옹邵雍 、정호程颢 、사마광司马光 、주희朱熹 ,명대明代의 상열桑悅、방이지方以智 、방효유方孝儒, 청대清代의 위려동魏荔彤등이다.
그 주요이유는 바로
첫째《황제내경.소문黄帝内经。素问》과 전국시대의 《주례周礼》와 비교해 보면 같은 점이 아주 많아 이 두 책이 같은 시대의 책이며, 같은 사상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기.편작전史记·扁鹊传》의 의학 이치에 관한 내용이《황제내경.소문黄帝内经·素问》의 내용과 서로 유사하지만 소박하고 원시적인데 반해. 的内容相类似,《사기.창공열전史记·仓公列传》에서 나오는 의학 이치와 관계있는 내용은 오히려 《황제내경.소문黄帝内经·素问》의 내용보다 약간 진보한 것으로 보아 황제내경은 당연히 편작시대 이후이면서 창공시대 이전의 작품으로 이 시대 역시 전국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황제내경黄帝内经》의 문체를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할 수 있다. 선진시대의 문장에는 운율을 많이 썼는데《소문素问 》중에는 운율을 갖춘 문자가 특별히 많다.
청대清代의 《사고전서간명목록四库全书简明目录》에서도 이 관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사고전서四库全书》가 상당히 인정받는 위치에 있어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한 시기 西汉时期
명대明代 랑영郎瑛은 하우夏禹 때의 의적仪狄이 술을 만들었다는 전설과 “라罗”-비단-가 한대汉代에 나타났다는 증거를 가지고 《소문素问》이 서한시기西汉时期에 만들어 졌다고 추단하였다.。
현대 중의학자 유장림刘长林 ,오문정吴文鼎 등 역시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 주요 이유는 바로
첫째《황제내경黄帝内经》전체의 글자수가 약 20만 자가 되는데 2000여년 전이라면 거대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학서적이 만들어지려면 안정된 사회환경과 돈이 많이 드는 인력, 물력이 필요한데 해마다 전쟁을으로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전국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서한시기에 들어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의학가들이 비로소 의학 서적을 편저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만들어 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서한西汉 초기 회남왕淮南王유안刘安의 《회남자. 수무훈淮南子·修务训》에서 “세속사람들이 옛 것을 숭상하고 지금 것을 천시하므로 반드시 신농, 황제라고 쓴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했다.世俗人多尊古而贱今,故为道者必记之神农、黄帝而后能入说。”고 한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황제내경黄帝内经》은 책의 이름과 내용에서 볼 때 “황노학파黄老学派”와 관계가 밀접하고 또 황노학파가 가장 성행한 서한시기라야 책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증거라 할 수 있다.
세째 서한西汉의 사마천司马迁이《사기.창공열전史记·仓公列传》에서 서한 초기의 명의 순우의淳于意가 그 스승인 공승양경公乘阳庆에게서 전수받았다는 열 가지 의서 중에 황제내경黄帝内经을 써 놓지 않았다는 것도 황제내경이 서한 시대 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관점에서 옛 사람들이 황제내경이 만들어진 것이 전국시대라고 한 것이 비교적 믿을 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문, 영추의 모든 편들이 전부 전국시대의 작품이라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의학가인 여복吕复은 여기에 대해 내경은 한 시대, 한 사람의 손에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그럴듯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요제항姚际恒의《고금위서고古今伪书考》、주목周木의 《소문규략서素问纠略序》、정민정程敏政의《신안문헌집.운기설新安文献集·运气说》、황성증黄省曾의《오악산인집五岳山人集·内经注辨序》등들도 여복의 의견에 찬동했다.
비교적 과학적 관점은 황제내경은 결코 한 사람의 작자가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한 것이 아니고, 여러 작자들이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이루엇다는 것이다.
一、선진시기先秦时期에는 문체에 운어韵语가 많은데, 황제내경 중에도 운어가 적지 않은 몇 몇 이 있다,이런 부분은 아마도 선진시기의 작품일 것이다.
二、1973년에 출토된 장사长沙 마왕퇴马王堆백서帛书인 《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脉灸经》、1972년감숙甘肃무위한묘武威汉墓에서 출토된 장약산두压药简牍、1977년 안휘安徽 부양쌍고퇴阜阳双古堆 서한여음후묘西汉汝阴侯墓에서 출토된 “육왕빈반六王斌盘”과 “태을구궁점반太乙九宫占盘”괴 비교해 보면 《영추灵柩》중의 일부 편장篇章은 춘추전국시기에 만들어졌고, 어떤 것은 서한시기보다 더 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三、《황제내경黄帝内经》중에 인용된 《상하경上下经》、《규탁睽度》과 같은 일부 문헌들은 전국시기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기의 저작이다.
四、《소문.보명전형론素问·宝命全形论 》속에 쓰인 “검수黔首”란 말은 전국 혹은 진대의 국민에 대한 호칭이며,《소문.영란비전론素问·灵兰秘典论》중의 “상부지관相傅之官”과 “주도지관州都之官”은 조曹씨의 위魏 시기에 비로소 나타난 관명官名이다.
五、《영추灵枢 》중의 어떤 편장篇章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음양계일월阴阳系日月篇》에 “인자, 정월지생양야寅者,正月之生阳也”라는 구절이 있는데,그러므로이 편장은 한무제汉武帝 태초원년太初元年(기원전100년) 에 반포된 태초력太初历의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할 수 있다..
六、《소문素问》 중의 몇몇 편장은 간지기년干支纪年을 쓰고 있는데,간지기년을 채택한 것은 동한东汉의 일이다. 《소문素问》제칠권은 망일亡佚된지 오래다가 당 唐 왕빙王冰이 그 스승인 장공张公의 비본秘本에 근거하여 《천원기대론天元纪大论》、《오운행대론五运行大论》、《육미지대론六微旨大论》、《기교변대론气交变大论》、《오상정대론五常政大论》、《육원정기대론六元正纪大论》과 《지진요대론至真要大论》을 보충해 넣었는데 실제로 이것은 또 하나의 다른 의서인 《음양대론阴阳大论》이었다. 갑자甲子를 써서 한 해를 기록한 것으로 볼 때 동한东汉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AD085 )에 반포된 사분력四分历의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장중경이 상한잡병론을 지을 때 인용되었으므로 당연히 장중경보다 먼저이다.
七、《소문素问》중 제칠십이편《자법론刺法论》과 제칠십삼편《본병론本病论》은 왕빙이 《소문素问》을 배열하고 주를 달 때,이미 목차는 있는데 본문은 없었다. 송대의 유온서刘温舒가 《소문입식운기론오素问入式运气论奥》를 지을 때는 이 두 편을 《소문유편素问遗篇》이라 하면서 뒷 부분에 늘어 놓은 것으로 보아 이 두편이 당송唐宋사이의 위작伪作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황제내경黄帝内经》은 한 시대에 엮어진 것이 아니며, 작자고 한 사람 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책으로 쓰여진 것은 전국시대이며, 그 각각의 편장篇章은 전한과 후한에서 이루어졌다. 왕빙이 보충하고 유온서가 덧붙인 것은 황제내경의 글로 볼 수는 없지만 관례에 따라 내경에 귀속시켜도 안 될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