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만산 상한론 강의

제18강 한 대의 도량형 제도와 경방 약량의 환산-2

臥嘗 齋 2025. 2. 21. 21:19

  우리가 보고 있는 상한론 경방經方의 용량은 한 대漢代의 도량형度量衡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오늘날 임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방을 쓸 때,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용량과 한 대漢代의 《상한론》과 《금궤요략》에 기록된 이런 약량들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약간의 시간을 내어 한 대의 도량형과 경방 약량의 환산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경방의 약량은 임상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약물의 용량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임상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미 배운 계지탕桂枝湯에서 계지와 작약의 용량을 각각 석 냥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계지의 용량을 더 많이 쓰면 그 처방은 계지가계탕桂枝加桂湯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해기구풍解肌驅風, 조화영위調和營衛하지는 못하고, 온보심양温補心陽, 강역평충降逆平衝함으로써 심양心陽이 허하여 하초의 한기가 상충하는 분돈奔豚을 치료하는 처방이 됩니다.
만약 계지탕에 작약을 더 많이 넣게 되면 계지가작약탕桂枝加芍藥湯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처방으로는 태음 비경太陰脾經이 사기를 받아 태음비경의 기혈이 어울리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복만시통腹满時痛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런데 여러분은 제량이 별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까?
내가 전에 강의하면서 마황탕麻黄湯속의 마황, 계지, 감초 이 세 가지 약물의 비율이 3: 2: 1이 되어야만 한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비율을 1: 2: 3으로 바꾸어 버리면 이 처방은 땀을 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량을 알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이 임상치료에 매우 중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또 오령산五苓散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 처방은 계지의 용량이 가장 적고, 택사의 용량이 가장 많은데, 저령, 복령, 백출은 이 둘의 가운데 용량을 씁니다. 이런 제량의 비율에 따라 만들어진 산제散劑는 동물실험에서 매우 뛰어난 이뇨효과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약제를 같은 량으로 해서 만든 산제散劑로 동물실험을 했더니 그 효과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대의 제량을 정확히 알고, 경방經方의 이런 약재 사이의 비율을 확실히 아는 것이 임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장중경이 한 대의 사람이므로 그가 쓴 책에 인용된 방제方劑가 한 대의 도량형에 따른 한 대의 제량劑量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대의 도량형 제도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별로 크게 어렵지 않아 오히려 비교적 쉽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역사책에서 이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반고班固의 《한서.률력지漢書. 律歷志》에 ‘천이백서중십이수千二百黍重十二銖’라고 했습니다. 기장 1200개의 무게가 12수銖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량지위량兩之爲兩’ 이를 두 배로 한 것이 량兩이란 말입니다. 처음 잰 무게가 기장 1200개 이고 이는 12수 이므로 1수銖는 기장 100개 입니다. 그리고 이 기장 1200개를 두 배로 한 것이 량兩이란 무게 단위입니다. 곧 량은 기장2400개의 무게이자 24수銖에 해당합니다. ‘십육량위근十六兩斤, 삼십근위균三十斤爲鈞, 사균위석四鈞爲石’ 이라 하여 16량이 한근斤이 되고, 30근이 한 균鈞이 되며, 4균이 한 석石이 된다고 했습니다. 《한서.률력지》의 이 귀절이 명확하게 한 대의 도량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 무게를 달던 단위와 단위 사이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때의 무게 단위는 수銖, 량兩, 근斤, 균鈞, 석石으로 스물 네 수가 한 량, 열 엿 량이 한 근, 설흔 근이 한 균, 네 균이 한 석입니다. 천균일발千鈞一髮이란 숙어가 있는데 그것은 머리카락 한 올로 천 균이나 되는 물건을 들어 올렸다는 말로 곧 30000근의 무게가 머리카락에 매달렸다는 말이니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천균일발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숙어입니다. 그 밖의 무게 단위인 일 석一石은 사 균四鈞인데, 여러분이 알아두어야만 할 것은 이 ‘석石’이 후세에 용량단위로 쓰이면서는 ‘단’으로 읽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무게단위로 석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장1200개의 무게를 반 량半兩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지방에서 생산된 기장을 재야 할까요? 금방 수확한 기장일까요? 아니면 일 년 쯤 묵어 마른 기장일까요? 여러분이 이들을 하나의 기본적인 무게 단위로 보고 잰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정확한 무게일까요? 하남에서 생산된 기장을 가지고 셈해야 할까요? 북경에서 난 기장으로셈해야 할까요? 이들은 모두 문제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역사박물관에는 동한東漢시대의 사농동권司農銅權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농司農은 국가에서 농업을 관리하던 가장 높은 기관이었고, 사농동권은 거기에서 만든 표준 무게를 정해주는 기구였습니다. 당시의 무게 계량 기구의 계열로 보면 이것은 열 두 근 무게의 구리덩어리입니다. 이것으로 지금의 무게와 환산하면 한 대의 한 근斤은 250g과 같습니다. 그러면 한 대의 한 량两은 250g을 16으로 나누었으므로 15.625g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량을 셈하기 쉽도록 대개 15g으로 봅니다. 조금 차이가 나도 별 관계가 없으므로 한 량을 15g으로 셈합니다. 계산이 편하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무게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말해 두겠습니다.
다음으로 부피를 말하겠습니다. 반고의 《한서.률력지》에는 또  ‘천이백서실기약千二百黍實其龠’이라 했습니다. 기장1200알로 한 약龠을 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작은 부피 단위를 약이라고 했는데 1200개의 기장을 담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합약지위합合龠之爲合’  두 개의 약을 합친 크기가 합이란 말입니다. 이래서 왜 부피단위에 합이란 글자가 쓰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피단위로 쓰일 때는 ‘합’이라 읽지 않고 ‘홉’이라고 읽습니다. ‘십홉위승, 십승위두, 십두위곡 十合爲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라 했으니, 열 홉이 승升이 되고, 열 승이 두斗가 되며, 열 두가 곡斛이 됩니다. 이것이 《한서.률력지》에 기재된 부피를 재는 다섯 단위입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약에서 홉은 이진제二進制이고, 홉에서 승, 승에서 두, 두에서 곡은 십진제十進制 입니다. 이 약, 홉, 승, 두, 곡이 부피를 재는 다섯 단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피도  방금 말했던 이유로 1200개의 기장을 기준으로 그 용적客積을 재는 것이 사람들에게 공인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대의 표준이 되는 용량을 재는 단위 또한 출토된 한 대의 유물로 살펴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대의  구리로 만들어진 홉合, 승升, 두斗, 곡斛은 북방의 숱한 박물관들에 모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동홉銅合은 너무 작아 손으로 잡기 힘들기 때문에 길다란 자루가 달려 있습니다. 얼른 보면 조그만 국자 같지만 사실은 동홉입니다. 동승铜升도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재어보면 한 홉은 20ml과 같고, 일승一升은 200ml, 일두一斗는 2000ml에 해당합니다. 일곡一斛은 당연히 20000ml입니다. 산동박물관에 있는 곡斛에 쌀 20000ml를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북경의 역사박물관에는 동홉도 있고, 동승, 동두도 있지만 동곡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동곡은 매우 커서 만약 있었다면 인상에 남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유물이 있으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매우 쉽지요.
마황탕麻黄湯을 매 번 8홉을 먹으라 했는데 바로 160ml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지탕桂枝湯을 매 번 일승一升 씩 먹으라 했는데 이것은 200ml 씩  먹으라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먹는 약의 용량과 큰 차이가 없지 않나요? 마행석감탕麻杏石甘湯의 방후方後에, 이 마행석감탕은 아직 우리가 공부하지 않았군요. 방후에 ‘온복일승温服一升’이란 말이 나오고 이어서 ‘본운황이배本云黄耳杯’라고 적혀 있습니다. 후세의 어떤 의사는 이 말은 잘 못 들어간 말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황이배黄耳杯라 할까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상한론》을 정리하던 사람이, 그 사람이 왕숙화王叔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 사람이 정리하면서 베꼈는데, 그가 베낄 때 그가 베끼던 책이 아닌 다른 책을 보니 원래 베끼던 책처럼  ‘온복일승温服一升’ 이라고 쓰여 있지 않고 ‘온복일황이배温服一黄耳杯’ 라고 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감校勘하던 사람이 ‘온복일승’이라 쓰고 원본에서는 ‘온복일황이배’라 썼던 것 입니다. 이는 ‘본운本云’이라 한 것으로 짐작한 것입니다. 그는 이 황이배를 승升으로 바꾸면서 ‘온복일승’이라고 쓰고 뒤에 ‘본운황이배’라고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황이배黄耳杯는 무엇일까요? 역사박물관에는 황이배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물잔으로 나뭇잔에 옷칠을 한 것입니다. 이 잔은 타원형인데, 잡기 쉽도록 두 개의 손잡이를 마주보게 달아 놓아 귀처럼 생겼고 귀한 집에서는 그 귀에 금을 입혀 놓았기에 황이배라 한 것입니다. 이 황이배는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요? 바로 200ml 로  일승一升 입니다. 그래서 ‘본운황이배’는 원래 황이배 한잔을 마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일 승으로 고쳤다는 말이지요. 이것으로 일 승이 일 황이배로 200ml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상한론에서는 약물의 제량에 도량을 말하기도 했고 말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오령산五苓散 조문에서는 ‘백음화복방촌비白飲和服方寸匕’라고 썼는데, 방촌비는 한변이 일 촌寸인 평평한 약 숟가락입니다. ‘취산불락위도聚散不落爲度’라 했는데 이는 가루약을 떴을 때 옆으로 떨어지지 않고 남은 량을 일 방촌비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 촌寸의 길이는 얼마일까요? 그래서 이는 도량과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마자인환麻子仁丸이란 처방에는 후박厚朴일 척一尺을 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일 척尺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역시 도량을 쓰고 있습니다. 반고의 《한서.률력지》를 보면 이런 뜻을 가진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일서위분一黍爲分’ 인데 그 뒤에 ‘십분위촌, 십촌위척, 십척위장, 십장위인十分爲寸, 十寸爲尺, 十尺爲丈, 十大爲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분分, 촌寸, 척尺, 장丈, 인引은 한 대의 길이를 재는 도량형의 다섯 개 단위입니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규칙적이어서 열 배로 불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일 분은 얼마일까요? 기장 한 알의 직경입니다. 그래서 일 촌은 열 개 기장알의 직경이 됩니다. 이로써 고대의 도량형은 량식糧食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계량의 기본 단위가 바로 기장 한 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이라고 하는 말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 일 촌은 지금으로 보면 얼마만한 길이일까요? 이 또한 출토된 유물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계량과학연구원에서는 전국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14자루의 한 대 동척铜尺, 철척鐵尺 혹은 나무로 된 척尺, 대나무로 된 척尺을 모았습니다. 어떤 것은 일 촌, 이 촌 되는 조각으로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만 이들을 재어 일 촌이 2.3cm이며, 일 척이 23cm와 같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한 대의 오호대장五虎大將이었던 관우關羽는 키가 팔 척八尺이라 했으니 23cm로 곱하면 184cm가 되는데, 이는 현대의 유명한 배구선수인 랑평郎平과 같은 키입니다. 그 때의 대장군이 랑평만 했다니 이렇게 보면 너무 이상할 정도로 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관우의 실제 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만 할 것은 출토된 이 14자루의 척尺에 모두 눈금을 나누어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대에는 길이를 그다지정확하게 재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한서. 률력지》 에 일서위분이란 말을 직접 써 놓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 속에서 이런 뜻이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 조漢朝의 뒤는 바로 진 조晋朝인데 진 조에서는 무게를 잴 때 량과 수 사이에 분分이라는 단위를 넣고 6수를 일 분分이라 하여 4분이 한 량이 되도록 했습니다. 《상한론》에서 분을 무게단위로 쓴 처방은 단 하나로, 바로 마황승마탕麻黄升麻湯에서 입니다. 장중경 시대에는 분이라는 단위가 없었으므로 진 조 이후에 상한론을 베끼면서 약의 중량을 분으로 고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금궤요략》속에서는 적지 않은 처방들에 분을 무게 단위로 쓴 처방들이 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진.당晋唐이후의 사람들이 베껴쓰면서 환산하여 고친 것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장중경이 원래 썼던 그대로의 단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물백산三物白散에서는 길경 3분分, 파두 1분分, 패모 3분分이라 쓰고 있는데 이 분은 실제의 무게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물 사이의 무게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길경과 파두, 패모의 비율이 3:1:3이라는 말입니다. 또 사역산四逆散에서는 시호, 지실, 작약, 감초 각10분分 이라 되어 있는데 이 분 또한  약물사이의 비례를 나타내는 것으로 모두 같은 량을 넣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한론》을 읽을 때는 ‘분’이라는 글자에 주의해야 합니다. 마황승마탕이 실제의 무게단위라는 것을 빼면 다른 분은 모두 제량의 비례입니다. 그렇지만 《금궤요략》은 다릅니다. 《금궤요략》에서는 많은 처방들이 분을 무게단위로 쓰고 있어 우리는 《금궤요략》이 진단이후의 사람들이 베끼는 과정에서 단위를 고쳐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대의 도량형제도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진 조晋朝(BC265~420)에서 송 조宋朝(BC960~1276)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도량형제는 매우 뚜렷하고도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변화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한 근의 무게가 250g에서 600g언저리까지 으로 죽 치솟았고, 일 승은 200ml에서 1000ml까지 5배로 불었으며, 일 척은 23cm에서 33cm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진 조에서 송 조 사이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7~800년에서 1000년 사이인데 도량형제도에 왜 이런 엄청난 변화가 생겼을까요? 중국계량과학연구원中國計量科學研究院은 주로 당시 사회에서 지주가 토지임대료를 더 올려받으려 했고, 국가에서도 세금을 더 많이 받으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인되어 있는 용기容器를 몰래 늘렸던 것입니다. 저쪽 지주가 늘리는 것을 본 이쪽 지주도 늘리는 식으로 여기저기의 지주들이 늘려가자 국가에서도 새로 표준을 정해 늘림으로써 두루 쓰이는 고정된 용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지주들은 다시 이 표준 용기를 늘리고 하는 그런 짓들이 이어진 탓에 600에서 800년 사이에 도량형제도가 이렇게 엄청나게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용기가 늘려짐으로써 무게가 이렇게 늘어났다면 길이만 늘지 않았을까요?
송 대宋代에서 청 대法代의 도평제度平制에 이르기 까지의 중국 도량형제는 거의 안정되어 전처럼 마음대로 늘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 뒤 1000년 사이는 늘리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중국의 경제유통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세금을 거두고 지주가 토지임대료를 받을 때 더 이상 단순하게 곡식으로만 받지 않고, 화폐로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소설을 보면 모두 은자銀子(돈)로 내거나 은표銀票(수표)로 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돈으로 지불하면 되는데 늘린 용기를 써서 곡식을 되어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송 조宋朝이후에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의 류통이 원활해져 용기를 늘려서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사라짐으로써 도량형에 별 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량형이 안정되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한 조漢朝이후 송 조에 이르기까지는 도량형제도에 급격한 변화들이 발생했지만 송 조에서 청 조清朝에 이르는 동안에는 도량형제도가 기본적으로 안정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진, 당, 송에 이르는 시간 동안에 국가는 도량형을 어떻게 규정하였을까요?  진서晋書를 보거나 당 대唐代의 역사서를 보면 의약醫藥은 사람의 수명과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했고, 천문天文은 하늘의 변화를 살피므로 국가의 흥망과 안위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천상天象도 매우 중요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약과 천문에서는 옛 제도를 따르게 했지만 사회의 일반 상업에서는 새로운 도량형을 썼습니다. 당 대 손사막孫思邈의 천금방千金方, 왕도王濤의 외대비요外臺秘要를 보면 그 약물을 재는 단위가 아직 한漢나라 제도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송 조 이전의 한의학서적에서도 모두 한나라 제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송 조에서는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한약의 복용방법과 제량도 개혁하였습니다. 복용방법으로는 자산煮散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약물을 거칠게 갈아 그것을 삶아 약 찌꺼기와 같이 먹는 것으로 이것은 송 조의 독특한 복용방법입니다. 약찌꺼기와 같이 먹게 되면 약의 복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송 조의 처방을 보면 모두 약물의 량이 매우 적었는데, 용량을 셈할 때는 송 조 당시의 도량형제도를 썼습니다. 송 조의 계량 단위는 근斤, 량兩, 전錢, 분分, 리厘, 호毫를 썼으므로 우리가 한의학서적에서  이런 단위가 쓰여진 보면 이것이 송 조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송에서 청까지의 도량형제도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에서 청사이에 쓰여진 책에는 모두 이런 도량형제도가 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역사에서 도량형제도가 매우 복잡하게 엉킨 변화가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한의학서적에서 약물의 용량은 매우 간단하게 살필 수있습니다. 송 조 이전에는 모두 한 제를 썼고, 송 조 이후에는 모두 송 제를 썼습니다. 근대까지 모두 송 제를 쓰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 도량형을 조금 개혁했는데 계산이 편하도록 한 근을 500g 으로 바꿨지만 실제로는 별로 크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노중의老中醫들이 3전錢이라고 처방을 쓰셨으면 1 전을 3g으로 보아서 오늘날 우리는 9g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때로 약사가 가격 계산이 번거롭다고 느끼면 이를 10g으로 계산해 버리기도 하기에  의사도 9g의 약을 10g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래도 원래 처방한 약량과 큰 차이는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도량형을 바꿀 때 지방에 따라 대부분의 지방과는 달리 다른 무게 표준을 쓰던 곳도 있었습니다. 흑룡강성黑龍江省을 예로 들겠습니다. 흑룡강성은 도량형을 정부에서 바꾸기 전에는 의사들은 한 량을 50g으로 셈하고 있었습니다. 일 전錢을 5g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 북경지방 사람들이 처방을 3g, 6g, 9g, 12g이라 낼 때 그들은 5g, 10g, 15g, 20g으로 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