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소양운기의少阳运气义
앞에서 소양경의少阳经义를 이야기했을 때 소양경이 지나가는 위치가 그 추枢를 맡아보는 기능과 매우 들어맞아 우리에게 경전经典의 개념이 매우 엄밀하여 기능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구조적인 기초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에 나타난 개념을 탐구할 때마다 건성으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모두 빈틈없이 진지한 자세로 다루어야 한다. 경전 개념은 매우 넓은 의미 영역을 가지고 있어 요즈음에 편찬된 교재로는 그 개념에 포함된 뜻을 모두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지금까지 통합편찬된 교재가 6판이며, 곧 7판 교재를 출판하려고 하고 있지만 이 교재들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판본版本이 다르다는 것을 빼면 내용에는 새롭고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한의학을 교육하는데 이런 통편교재统编教材를 마련하고, 또 이렇게 자주 교재를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이 문제는 모두 같이 의론해 볼 가치가 있다.
경전에 나타난 개념들은 모두 엄청난 힘을 기울여 연구하고 탐색해야 하는데, 내가 이 책에 《사고중의思考中医》란 이름을 붙인 것도 사실 한의학에서 일부 중요한 개념에 대한 사고, 특히 《상한론伤寒论》 중의 일부 주요 개념에 대한 사고를 해보고자 하는 뜻이었다. 한의학의 일부 기본 개념을 분명히 알면 한의학의 전체 얼개가 아주 훤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 때는 여러분이 한의학을 전공하든 말든-중국은 양의와 한의 중 하나를 나중에 선택하게 되어 있다.-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보든 여러분의 한의학에 대한 인식을 도무지 흔들 방법이 없게 된다. 이런 인식을 불교에서는 정해定解라고 부르는데, 이 정해는 깨달아 얻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풀어낸 뒤면 깨뜨릴 수가 없다. 현대화의 시대에 한의학을 잘 배워내려 생각한다면 이 정해를 세운 뒤라야 할 것이다.
운기运气에서 소양은 상화相火를 맡아본다고 했는데,상화라는 개념을 세우게 된 데는매우 중요한 뜻이 있어 이 삼초에서 엮여 나온 문제들을 모두 분명하게 다룰려고 하면 지금 이 정도의 지면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얕은 데서부터 차츰 깊이 들어가면서 실체에 가까이 느껴보게 하려고 한다.
상화는 군화君火와 바로 상대되어 나온 개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상화를 토론하려면 반드시 군화와 이어지게 되어 있다. 운기의 상화는 사람에게서 삼초三焦、심포心包에 속하고 군화君火는 심心과 소장小肠에 속하므로 먼저 삼초와 소장은 잠깐 젖혀두고 지금은 이 심과 심포를 먼저 보기로 하자. 심 말고도 하나의 독립된 심포라는 기관이 있고 또 수궐음手厥阴이란 이름으로 심포와 오롯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한의학에만 있는 매우 특이한 이론이다. 심 말고 간비폐신肝脾肺肾에도 심의 경우처럼 간포肝包、비포脾包、폐포肺包、신포肾包가 있을까? 그렇지 않고 심에만 있다! 그래서 심에 심포가 있는 것은 화火가 군君과 상相으로 나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일반적인 문제로 보고 토론할 수는 없다. 지난 날의 의학자들, 특히 금원시기의 일부 의학자들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일반화하여 보았는데, 화가 군상으로 나뉘어 하나가 둘로 되어 토목금수土木金水와의 일대일 형식이 무너지면서 본디 수화관계에서는 일대일이던 관계가 수 하나가 화 둘을 상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 하나가 어떻게 화 둘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음상부족阴常不足,양상유여阳常有余”라는 관점으로 보았고, 그럼으로써 자음파滋阴派,사화파泻火派가 이에 맞추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이렇게 간단히 보아 넘길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화에 군화君火와 상화相火가 있다고 할 때는오운육기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심과 심포로 나눌 때는 장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행五行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수화水火에 어떻게 구별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열寒热이란 구별이 있다. 천지天地에 어떻게 구별이 없겠는가? 고하高下로 구별된다. 한열이나 고하로 구별할 수는 있지만, 유여有余와 부족不足으로 이 구별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걸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심과 나머지 네 장, 화와 그 외의 사행四行을 같은 수준으로 놓아두고 생각하면 매우 힘들어진다. 그들 사이는 평등하지 않고 차별이 있다. 이런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자연의 성질이 일그러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남녀평등이란 생각에도 찬동하지 않는다. 남녀는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해질 수도 없다. 남자가 월경을 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지 않다면 평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라야 월경을 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도 여러분이 남녀가 평등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어갈까? 긴 안목으로, 근본적으로 손익을 따진다면 손해를 보는 쪽은 여성일 수 밖에 없다. 남녀평등으로 여성의 “권리权利”가 커지는 것 같지만, 사실상 여성의 부담만 갈수록 늘어날 뿐이다. 앞 문으로는 호랑이를 쫒았지만 뒷 문으로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 된다. 평등을 외칠수록 더욱 평등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한 이런 차별, 이런 불평등은 형이상과 형이하에서 더욱 잘 표현된다. 《역易·계사系辞》에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 했다. 형이상과 형이하 및 도道와 기器의 문제는 우리가 이미 첫 장에서 토론했는데, 심은 군주지관으로 형이상의 위치에 있고 나머지 장부는 신사지관臣使之官으로 형이하의 범위에 놓여 있다. 위의 이 관계를 오행으로 본다면 더 나은 설명이 가능하다. 오행 중에서 화는 심에 속하고 나머지 금목수토는 폐간신비에 속한다. 오행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화와 나머지 사행의 차이이다. 화를 놓아두면 위로 올라가는데 그것은 화의 성질이 염상炎上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금목수토를 놓아두면 어떻게 되나? 그저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그래서 오행 안에서는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별이 분명히 드러난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아래 위로 나누어 진다.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에서 도와 기는 무슨 구별이 있는가? 위의 유형有形,무형无形과 향상向上,향하向下의 구별 외에 매우 본질적이면서 내재적인 구별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기器에는 생화生化와 승강출입升降出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문素问·육미지대론六微旨大论》에 "시이승강출입是以升降出入,무기불유无器不有.고기자생화지우故器者生化之宇,기산즉분지器散则分之,생화식의生化息矣"라 했다. 기器가 있으면 생화生化가 되지만 생화하지 못할 수 있는것도 당연하며, 기가 있어서 승강출입이 되지만 그래서 승강이 멈추고 출입이 막힐 수도 있다. 이는 한 쌍의 매우 변증법적인 관계로 이미 기器가 만들어질 수 있으면 자연히 기가 흩어질 때도 있으므로 "기산즉분지器散则分之,생화식의生化息矣"라고 했다. 생화가 있어 불생화不生化도 있다는 말을 불교의 관점으로 보면 바로 생生이 있으면 멸滅이 있어 생멸生滅이 서로 이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이 생화와 불생화 및 이 생멸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이 기와 유관하며, 이 형이하와 유관하다. 그래서 기器세계의 것, 형이하의 것은 모두 생화가 있으며, 모두 생멸이 잇달아 나타난다. 생화가 있고, 생멸이 있다는 것은 바로 변동变动이 있다는 것이므로, 《역易》이든 의학이든 모두 "성패의복생호동成败倚伏生乎动" 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변동이 생기므로 성패成败와 흥쇠兴衰가 생기고, 륜전표류轮转漂流가 생기게 된다. 영원하고자 해도 생화가 있고 생멸이 있는 기세계 차원이나 형이하의 차원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영원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단 하나의 방법만이 있는데 그것은 생화生化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생멸이 없고, 생화가 없으면 자연히 변동이 없어질 것이고, 변동이 없으면 성패흥쇠도 없으므로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가능성을 황제도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소문·육미지대론》의 대화로 알 수 있다. "제왈帝曰선善.유불생불화호有不生不化乎?기백왈岐伯曰실호재문야悉乎哉问也!여도합동与道合同유진인야惟眞人也. 제왈帝曰선善." 이로 보아 생화하지 않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인데 조건이 바로 "여도합동与道合同" 곧 "형이상形而上"에 녹아드는 것이다. 이렇게 형이상 차원, 도의 차원이 심心의 차원에 있으므로 기器를 갖지 않으며 기가 없으므로 생화가 없고 생화가 없으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부증불감不增不减불구부정不垢不净"-반야심경-한다. 불가에서나 도가에서나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 경지, 이상적 목표가 사실 이 형이상의 범위 속에 있다. 《노자老子》가 "위학일익为学日益, 위도일손为道日损, 손지우손损之又损, 이지우무위以至于无为"라 했는데 무엇을 더는 것일까? 바로 이 기세계의 것들을, 형이하의 것들을 덜어내는 것이다. 기세계에 대한 집착이, 형이하에 대한 집착이 적어질수록 형이상으로 향하게 될 것이 당연한데 이것이 바로 여도합동与道合同의 과정이다. 불가에서는 "간파看破, 방하放下, 수연随缘, 자재自在."를 말하는데 무엇을 간파하고 무엇을 방하하는가? 바로 이 기세계, 형이하를 간파하고 방하하는 것이다. 형이하 속에는, 기세계 속에는 간 데마다 속박束缚이고 장애障碍니 어떻게 자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대자재大自在를 얻으려면 반드시 "간파看破, 방하放下"해야만 한다.
불가에서는 수련하는데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하고, 도가에서는 수련할 때 "수심양성修心养性"을 말하여 수련이 모두 형이상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형이상과 형이하는 도기道器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圣과 범凡도 구분하며 동서문화의 차별도 구분해 낸다. 여러분이 동서문화를 비교연구하려 하면서 여기에 착안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비교해 낼 수 있을까? 우리가 화를 군상君相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려면 여기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심화가 형이상의 차원에 있다고 했는데, 군주君主로서 형기形器를 갖추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기세계의 다른 장부들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어떻게 화로써 작용함으로써 수곡을 삭이며, 진액을 쪄올려 훈부熏肤, 충신充身, 택모泽毛하겠는가? 그래서 상화로 하여금 이 "범화凡火"로서의 직책을 수행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화란 개념이 생긴 것은 바로 이런 이성사고와 실제수요의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이상과 형이하로 보면 군화는 형이상에 속하고 상화는 형이하에 속한다. 형이상이므로 군화는 밝음으로 작용하고, 형이하이므로 상화는 위치로 작용한다. 심은 군주지관으로 신명이 나온다. 《역易·계사系辞》에서 "신무방神无方 "이라 했는데 신무방이므로 상화로써 방方을 삼고, 위位를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神의 작용은 방위로서가 아니라 다만 연緣을 따라 나타나는데, 이 기세계의 차원에서는 방위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상화를 내세워 방위로 삼은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과의 가장 큰 차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이야기 했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주동용화主动用火"도 하나의 가장 큰 차이라고 했었다. 이제까지 모든 동물 중에서 오직 인류 만이 스스로 불을 쓸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스스로 불을 쓸 수 있다는 현상의 배후에 더욱 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차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가 가진 독특한 사유思维이다. 심화가 신명을 맡아보므로 화와 사유는 밀접히 연계되어 있어 화가 사유를 맡아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화를 군화와 상화로 나누어 형이상과 형이하로 구획짓고 있으므로 사유도 군상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유의 영역에서 어느 것이 형이상이고 어느 것이 형이하라고 보아야 할까? 잠재의식, 무의식 및 사유 중의 직각直觉이 형이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논리적 사유가 형이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사유와 의식 문제는 갈수록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더우기 인류문명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발견 뒤에 숨은 사유와 의식과정과 이런 과정 중에 드러난 조화로움과 놀라움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면서 아울러 깊이 감동하게 한다. 역대의 과학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탐구하면서 -“진상대백真相大白”-진상이 환히 드러나길 바래 왔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것들이 어떻게 폭발하게 되었을까? 심령心灵의 깊은 곳에서 불려나온 것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 대해 플라톤은 《파이돈Phaeda斐德罗》에서 “이렇게 깨워져서 불려 나온 것들은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줄곧 무의식 영역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것들이다.”라고 말했다.
행성운동의 법칙Kepler's laws을 발견한 케플러는 그의 이 발견으로 드러난 조화에 깊은 감동을 받고 《세계의 조화Harmonices Mundi世界的和谐》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람들은 '영혼이 개념적 사유에도 참가하지 않고 또 미리 조화된 관계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외부 세계에 이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이 문제에 대해 나는 ‘순수한 이념 혹은 우리가 말했던 조화의 원형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 스스로가 본디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개념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천적 직감에서 나온 것이다.”
저명한 물리학자 파울리Wolfgang Pauli는 케플러의 이런 생각에 대해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 질서없이 경험했던 재료들로 부터 이념이라는 다리로 향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종의 일찌기 영혼 중에 있어 왔던 원시의상原始意象(images)-케플러의 원형-때문이다.이러한 원시적 의상은 결코 의식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합리형식화될 수 있는 관념과 서로 연계되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은 인류 영혼의 무의식 영역속에 있는 일부 강렬한 감정 색깔을 가진 의상意象으로, 그것들은 생각해내진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느껴진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은 바로 일찌기 존재했던 의상과 외부의 객체 행위가 서로 협조일치됨으로써 느끼는 것이다. ”(위의 두 인용문은 수브라마니안 챤드라세카르Subrahmanyan Chandrasekhar가 짓고,양건업杨建邺、왕효명王晓明 선생이 번역한 《쉐익스피어, 뉴튼 그리고 베토벤》에서 따온 것이다. 이에 여기서 감사드린다!)
하나의 창조创造,하나의 빛나는 사상思想,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하나의 이론들은 일찍부터 영혼 속에 존재해 왔던 어떤 원시의상原始意象으로 부터 온 것이다. 이런 원시의상은 외부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의식이라는 층면层面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원시의상原始意象은 바로 무의식无意识에서 부터 나온 것으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공자孔子가 《역易·계사系辞》에서 말했던 “역무사야易无思也,무위야无为也,적연부동寂然不动,감이수통천하지고感而遂通天下之故。”란 한 줄의 명언을 생각나게 한다. 위에서 말한 이 원시의상原始意象이 만들어 낸 사상思想이 다를 수도 있고, 그것이 만들어낸 창조创造도 다를 수 있지만 이 원시의상이란 존재에 대한 인식과 묘사는 이렇게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음 속 깊이 고성古圣과 금성今圣이 그 헤아림은 하나요, 동성东圣과 서성西圣의 헤아림도 한결같다고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易》이 어떤 학문인가? 유가儒家들은 왜 《역易》을 모든 경전의 으뜸으로 보았을까? 《역易》이 바로 전문적으로 원시의상 층면의 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아닐까?
“별은 아직 그대로 별이고, 달은 아직 그대로 달이며,산도 아직 그대로 그 산이며, 다리도 아직 그 다리네.”-유행가 가사- 인류과학이 지금까지 발명한 이런 위대한 이론들에서 그들이 드러내고 그들이 설명하는 것은 자연계의 기이한 균형관계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계 각 부분 사이와 각 부분과 전체 사이의 고유한 조화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자연 밖의 무엇을 결코 창조해 낼 수 없으며, 또 자연 안의 그 무엇도 줄일 수 없다. 별은 그대로 별이고, 달도 아직 그대로 달이다. 과학은 다만 자연이 주는 이 균형과 조화를 충분히 이용할 뿐이다. 여기까지 글을 써 오다가 문득 한의학이 바로 이런 학문이 아닌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의학은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드러내고,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이용하는 학문으로 너무 훌륭하게 만들어져 더 보탤 수 없는 학문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