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만산 상한론 강의

제1강 상한론의 저자-3

臥嘗 齋 2019. 2. 10. 22:03

중경의 의학 학습 경력學醫經歷
임억林億등의 송나라 신하가 쓴 상한론서《傷寒論》서序에 “장중경, 한서무전 張仲景,《漢書》無傳”-장중경은 한서에 전기가 없다-이라고 하여 《후한서後漢書》에 그의 전기가 없슴을 말하고, “견명의록운見《名醫錄》云”-명의록을 보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명의록은 당나라 감백종甘伯宗이 쓴 책으로 매우 유감스럽게도 명의록을 오늘날 우리가 볼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시수술어동군장백조始受術于同郡張伯祖,진득기전盡得其傳,시인언時人言,식용정미識用精微,과기사過其師”- 같은 군의 장백조張伯祖에게서 의술을 처음 배워 그 진전을 다 얻었으며, 그 때 사람들이 지식과 실용이 정미하여 스승보다 났다고 말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했습니다. 장중경은 최초에 그의 동향인 장백조에게 의학을 배웠으며 나중에 장백조의 학술경험, 학술사상을 모두 계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론지식과 실천수준이 모두 그의 스승을 초월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청출어람승어람青出于藍而勝于藍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장백조와 장중경은 한의학계에 대한 공헌으로 보면 중경의 공헌도가 그 스승 장백조를 훨씬 앞섭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훌륭한 스승에게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송대 장고張杲의 《의설醫說》에서 장백조에 대해 쓰고 있는데, 장백조는 남양사람으로 “독호방술獨好方術,진처정심診處精審”-의술을 유독 좋아하였고 진찰과 처리가 정심함-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곧 진단과 처리가 모두 매우 정당精當하고 모두 매우 신중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료개십전療皆十全” 즉 열 명을 치료하면 열 명을 다 치료해내어 “위당시소중爲當時所重” 그 때 모두들 매우 대단하게 여겨 존중을 받았던 명의였다고 합니다. “동군장중경同郡張仲, 리이사지異而師之, 인유대예因有大譽”라 했는데 이는 그래서 그와 같은 고향사람인 장중경이 이를 매우 존경하여 그 의술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큰 업적을 이루고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사출고도名師出高徒로 뛰어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가르쳐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즈음 스승과 제자를 묶어주는사대도師带徒-도제-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런 교육방법은 한의학술 계승의 발전규율에 딱 들어맞는방법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관점입니다.
두번째는 스승이 직접 제자를 가르치는 사대도로도 명의를 배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경은 무슨 대학에 들어간 것도 아니지만 한의임상의학의 기초를 다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직무職務
송대 국가교정의서국國家校正醫書局에서 쓴 상한론서《傷寒論》序 에서는 당대 감백종의 명의록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중경의 직무에 대해 “거효렴, 관지장사태수擧孝廉,官至長沙太守”라는 몇 글자를 적고 있는데, “효렴孝廉”은 직무職務가 아니고, 직칭職稱,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일반 백성 중 부모에게 효순하고 청렴봉사하는 우수한 청년을 이르는 명예로운 호칭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뒤 정부가 관리를 선발할 때 이것을 기초자료로 삼아 효렴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중경이 효렴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그렇지만 “관지장사태수官至長沙太守”란 말을 기재해 놓은 사서史書는 없습니다. 장사長沙란 이 지방은 한 대漢代에 군사,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지방이었으므로 장사태수는 사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서를 살펴보면 기록된 장사태수로는 손견孫堅이 있는데, 바로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뒤로 소대蘇代, 장선張羡, 장역张懌, 요립廖立, 한현韓玄이 있는데, 한현은 그 유명한 황충黄忠의 원래 상관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이 사람들은 모두 매우 유명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장사가 중요한 지방이어서 태수를 맡으려면 비중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중경은 태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사서에 적혀있지 않습니다. 어떤 tv 드라마에서 역사상에서 기재된 이런 태수의 임기중에 몇개월 빈 시간이 있는데 아무도 태수가 되지 않았던 그 기간 동안 장중경이 태수를 지낸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드라마에서 한 하나의 추측일 뿐으로 사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후대 특히 명대 이후의 지방지地方志에도 장중경이 장사태수였다는기록이 있습니다. 명 대 숭정崇禎오년 즉 기원1632년 남양성 동쪽에서 농민이 우물을 파던 중 돌비석을 파냈는데 이 석비石碑에 “한 장사태수 의성 장중경묘漢長沙太守 醫聖 張仲景墓”란 11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석비 출토 후 지금 이 비석은 남양의성사南陽醫聖祠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전문가가 고증해 본 결과 석각石刻의 풍격風格과 비광碑框-비틀-의 꽃무늬, 꽃의 배치 및 그림방식이 모두 진말 남북조晋末南北朝 석굴石窟의 인물상 만듦새와 당시 고묘古墓-고분-의 일부 채색화 풍격과 매우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1981년 의성사를 보수하던 중 사람들이 이 묘비墓碑의 아랫부분을 파게 되었는데, 그 밑부분에서 비석의 좌대를 발견하였고 그 좌대 측면에 새겨진 함화오년咸和五年”이란 네 글자를 찾아냈습니다. 함화咸和는 진 성제 사마연晋成帝司馬衍의 연호로 서기 330년에 해당합니다. 좌대측면에 새겨진 이 글자는 자체字体가 격식에 맞지 않고 삐뚤삐뚤하여 보기에 비석을 새기는 도공刀工이 칼을 시험할 때, 철필鐵筆을 시험하려고 아무렇게나 한 번 새겨 본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비체碑體-비의 몸-와 비좌碑座-밑받침-가 같은 연대의 물건이라면 , 기원 330년에 세워졌다면, 중경이 돌아가신 뒤 100년 남짓이 지났으므로 이 묘비가 장중경이 장사태수였다는 사실을 고증하는데 중요한 유물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비좌는 한백옥漢白玉인데 비석 자체는 청석青石이며, 비좌의 글자체와 비체의 한 장사태수 의성 장중경묘 라고 쓴 글자체는 완전히 달라 비좌가 비교적 이른 시기이고 비체는 조금 늦은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화문花紋으로 보면 진말 남북조시기의 작품같아서 그것이 중경이 장사태수였다는 사실을 고증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서 이 묘비에는 하나는 “장사태수長沙太守”, 하나는 “의성醫聖”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장사태수를 고증하여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의학계에서 언제 장중경을 의성이라고 부르게 됐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의학계에서 장중경을 의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이 묘비에 이렇게 새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대 당시에는 아무도 장중경을 의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장중경을 의성이라 불렀다면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반드시 장중경에 대한 전기를 써 놓았을 것이지만 이 두 사서에는 모두 그에 대한 전기를 지어 놓지 않았으므로 당시 아무도 그를 의성이라 부르지 않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왕숙화도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정리하면서 단지 “금수채중경구론, 대병진방今收采仲景舊論,對病真方”-장중경의 과거 이런 저작들과 병을 치료한 진방을 수집-했다고 하여 여기서 직접 중경이라 불렀으므로 의성이라고 하지 않은게 틀림없습니다. 그 약간 뒤 진 조晋朝 황보밀皇甫謐은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서문에서 “이윤이아성지재伊尹以亞聖之才,찬용신농본초,撰用《神農本草》,이위탕액以爲《湯液》,중경론광이윤탕액위수십권仲景論廣伊尹《湯液》爲數十卷,용지다험用之多驗”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윤伊尹이란 사람이 대성인에 약간 못미치는 재능- “아성지재亞聖之才”란 대성인大聖人에 약간 못미치는 재능입니다.- 이 있었는데, 그가 “찬용신농본초撰用《神農本草》” 즉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참고하여 “이위탕액以爲《湯液》” 《탕액湯液經》을 만들었습니다. “중경론仲景論” 곧 중경의 저작著作은 “광이윤탕액廣伊尹《湯液》”이윤의 탕액경을 보충, 확전擴展한 것입니다. “위수십권爲數十卷,용지다험用之多驗” 수 십권을 만들었는데 임상에서 써서 효험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진 조의 황보밀은 이윤과 같은 고대의 저명한 의사도 “아성亞聖”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경은 아성의 기초 위에 탕액경의 일부 내용을 보충, 확전하고 탕액경의 내용을 계승하여 한 부의 책을 썼는데, 이 책을 임상에 응용하니 매우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므로 진 조의 황보밀시대에도 장중경을 의성으로 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윤도 아성이라 했을 뿐입니다 당 대唐代에 와서 손사막孫思邈이 천금요방을 쓰면서 “강남제사비중경요방부전江南諸師秘仲景要方不傳”-강남의 여러 의사들이 중경요방을 감추어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이라 하여 직접 “중경요방仲景要方”이라 부르고, 그냥 “중경仲景”이라 불러 털끝 만큼이라도 중경이 “성聖”이라든지, “아성亞聖”이라는 말이 없어 “성聖”과 아무런 관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외대비요外臺秘要》에서도 장중경방張仲景方、중경방仲景方이라 하면서 바로 “중경仲景”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약 성인聖人으로 보았다면 바로 이름을 불렀을까요? 그러므로 당대에서도 그를 의성이라 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송 대 국가교정의서국에서 상한론을 교감각인校勘刻印할 때에, 그때가 기원1065년인데, 《상한론傷寒論》서문에서 “중경본이윤지법, 이윤본신농지경仲景本伊尹之法,伊尹本神農之經”이라 했는데 실제로 이 일단의 이야기는 진 조 황보밀의 그 침구갑을경 서문에서 말했던 그 부분에서 따온 것으로, 장중경은 이윤 탕액경의 법칙에 근거하여 상한론을 지었고, 이윤의 탕액경은 신농본초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쓴 저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래에 “득불위조술대성인지의호得不謂祖述大聖人之意乎”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대성인의 의사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 조宋朝의 임억林億、손기孫奇、고보형高保衡 등 국가교정의서국의 이런 관원들도 상한론서에서 매우 뚜렷하게 장중경은 고대 대성인의 의지를 계승했다고 말했을 뿐 장중경 본인을 의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서기 1144년에 성무기成无己가 《주해상한론注解傷寒論》을 지었고, 조금 지나서 성무기가 또 《상한명리론傷寒明理論》을 지었습니다. 이 두 저작 속에서 성무기는 아직도 송대국가교정의서국의 입장에 따라 장중경이 이룩한 업적이 성인의 업적과 비슷하여 성인의 업적을 계승한 것으로 보았을 뿐 아직 그를 성聖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