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충록, 경악전서

논치편论治篇(十)-1

臥嘗 齋 2018. 5. 22. 01:06

론치편论治篇(十)-1
병을 살펴 환자를 치료할 때는 정일精一해야 한다. 이 세상의 병이 비록 많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바탕은 하나이며, 세상에 사람을 살리는 처방들이 아무리 많아도 증상에 맞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하는 원칙은 반드시 한寒이 틀림없을 때 한을 풀어주어야 하고, 열熱이 아닐 수 없을 때라야 열을 내려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 뿌리를 뽑아버리면 모든 증상들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경《内经》에서 ‘치병필구기본治病必求其本.’-병을 치료할 때는 반드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이라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병을 진찰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병의 뿌리를 찾아 그런 뒤에 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만약 증상을 살펴보아 그 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 낼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아  그 요점을 알아내었을 때라야 약을 써야 하는데, 그러면  한 두 가지 약을 써더라도 뿌리를 뽑을 수 있고 혹 그 병이 오래되어 뿌리가 깊이 박혔더라도 대여섯가지를 쓰면 되며, 일곱  여덟 가지도 많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일곱 여덟 가지 약을 쓰더라도 주된 약을 제외하면 도와주고 끌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뜻은 하나일 뿐으로 이래야 고수高手가 된다.
요즘 의사들은 조그만 증상의 환자를 보아도 넓은 바다를 보듯이 막막하여 의견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약을 써야 될 때가 되면 할 수 없이 이 약 저 약 막 섞어 한 곳이라도 걸리라고 생각하면서  광락원야广络原野-막막한 넓은 들을 모두 얽어매려는 - 의 수법을 써 버리게 된다. 허虚하므로 보補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가  보하면 해로울까 두려워져서 다시 소消하는 약을 넣어 발목을 잡게 하고, 실實하니 소消해야겠다고 보았다가 깎아내려니 잘못될까봐  슬쩍 보하는 약으로  도와준다. 가장 웃기는 것은 차지도 덥지도 않고, 사하기도 하고 보하기도 하는 처방을 서슴없이 쓰면서 매우 알맞은 약을 썼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편구폐补偏救弊-치우친 것을 보하고 결점을 없앰-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풍风、화火、담痰、식食을 치료하는 약들을 한 처방에 모아놓고 쓰면서 두루 갖추었다고 자신있게 말하니 어떻게 병의 근본을 따라 치료했다거나,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돌보았다고 하겠는가? 이런 처방은 이 약으로 다른 약의 부작용을 막는 것만도 바쁠 텐데 어떻게 병을 치료하는데 까지 약의 힘이 미치겠는가? 그러다가 혹시 어쩌다 낫는다고 하더라도 보를 했기 때문에 나았는지 공攻해서 나았는지 무슨 약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대개는 고쳐내지 못하는데 그럴 때에도 보해서 고쳐내지 못했던 것인지 소消해서 그랬던 것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은 당연하다. 머리가 세도록 환자를 치료해왔어도 돌팔이로 늙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병을 보는 주관을 세우지 못해서 치료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정일精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병이 심하지 않을 때는 해가 크지는않다. 그러나 생명이 한 순간에 달린 위급한 때에는 옳은 처방을 골랐다 하더라도 그 용량을 충분히 넣을 용기가 없다면 어떻겠는가? 약의 힘이 병을 이겨낼 수 없으니 이는 마치 수레에 가득실린 땔감에 붙은 큰 불에 한 잔의 물을 끼얹는 꼴이 되어 불을 끌 수가 없다. 그런데 하물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이약 저약을 함부로 쓴다면 그 해로움은 또 어떠하겠는가? 바로 이런 무리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그르치게 되므로, 사람을 고치려고 의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치료의 요점은 반드시 정일精一하여 뒤섞지 않는 데에 있으며,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보补를 소消로 발목잡느니 차라리 순전히 보하는 약을 적게 쓰다가 차차 늘리는 것이 낫고, 공攻을 보补로 덜미를 잡느니 순전히 공하는 약을 약하게 쓰면서 여러 번 거듭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보를 하는 방법은 먼저는 가볍게 하고 나중에 세게 하여 치료해 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고, 공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는 느직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가파르게 하되 병이 나으면 바로 멈추는 것이다. 만약 마름질이 정확하지 못하게 되면 보하더라도 허한 것을 다스릴 수 없고, 공하더라도 실한 것을 없앨 수 없으므로 생명을 그르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빙 돌려서 비웃는 사람이  많을 것이 틀림없다. ‘옛 사람들도 약을 쓸 때 한 처방에 많으면 스무 가지도 넘게 같이 쓰는데 어떻게 그게 정일精一할 수 있겠는가? 어찌 옛 사람들이 자네보다 못하겠나? 자네는 상제相制상사相使의 묘한 이치를 모르는군. 하나만 알고 두루 통하지 못하여 동원东垣선생의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야.’ ‘ 상제라는 것은 그 독을 잡아주는 것일세. 비유하자면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쓸 때 그 사람이 너무 행동이 과격하여 해가 될까봐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아 적당한 데 그치도록 하고자 하는 것 뿐이라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만났을 때 어쩌다가 생기는 일일세. 처음부터 뚜렷이 드러난 일반적인 방법으로 어진 사람을 뽑아 쓴다면 다시 또 그 사람이 나대지 못하도록 미리 마음 쓸 까닭은 없겠지! 상좌相佐상사相使도 한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이 어려울 때 돕도록 다른 사람을 쓰는 것이지 나가던 물러서던 일을 못하도록 막아 서로 다투게 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장중경의 처방을 보면 정밀하고 간단하며 군더더기가 없어서 많아도 몇 가지 약을 썼을 뿐이라 성현圣贤의 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어쩔 수 없어서 행行 가운데 보補,보補가운데 행行하는 방법을 쓰더라도 그 또한 그 병세에는 당연히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다. 상한론《伤寒论》의 소시호탕小柴胡汤에서 인삼人参과 시호柴胡를 같이 썼다거나, 도절암의 황룡탕黄龙汤에서 대황大黄과 인삼人参을 같이 쓴 것은 바로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정확한 선택이므로 이는 요즘 의사들이 마구 섞어 쓰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도리를 깨칠 수 있어야만이 비로소 참된 주견으로 상황에 알맞게 쓸 수 있다.  동원의 처방에서 열 몇 가지부터 스물 몇 가지까지 쓴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많이 쓴 데는 깊은 뜻이 있다.  배우는 사람들이 그 방법을 본받으려면 반드시 그 처방의 약제들이 가진 하나하나의 기미氣味를 모두 알고, 모인 그 약제들의 성질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약을 많이 넣어야 하고 어떤 약을 적게 써야 하며, 어떤 약이 오로지 주가 되어야 하며 어떤 약이 좌사佐使로 작용하는지를 살펴 그 기미를 합쳤을 때 스스로 하나의 성질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뜻을 가진 처방이 되게 해야 동원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고 머리를 다스리고,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만 보거나, 심하면 서너 개의 병의 단서를 보고 이 약 저 약 섞어 쓰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내가 동원선생의 방법을 따른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동원의 방법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차라리 중경을 본받으려 한다. 감히 동원을 좇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방법을 말끔히 배우기도 전에 먼저 그 방법을 잘못쓰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니 그렇게 된다면 잃어버린 것이 어찌 하나의 처방에 그치겠는가? 밝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
论治篇(十)
凡看病施治,贵乎精一。盖天下之病,变态虽多,其本则一。天下之方,活法虽多,对证则一。故凡治病之道,必确知为寒,则竟散其寒,确知为热,则竟清其热,一拔其本,诸证尽除矣。故《内经》曰∶治病必求其本。是以凡诊病者,必须先探病本,然后用药。若见有未的,宁为少待,再加详察,既得其要,但用一味二味便可拔之,即或深固,则五六味七八味亦已多矣。然虽用至七八味,亦不过帮助之,导引之,而其意则一也,方为高手。
今之医者,凡遇一证,便若观海望洋,茫无定见,则势有不得不为杂乱而用广络原野之术。盖其意谓虚而补之,则恐补之为害,而复制之以消;意谓实而消之,又恐消之为害,而复制之以补。其有最可哂者,则每以不寒不热,兼补兼泻之剂,确然投之,极称稳当,此何以补其偏而救其弊乎?又有以治风、治火、治痰、治食之剂兼而用之,甚称周备,此何以从其本而从其标乎?若此者,所谓以药治药尚未遑,又安望其及于病耶?即使偶愈,亦不知其补之之力,攻之之功也。使其不愈,亦不知其补之为害,消之为害也。是以白头圭匕,而庸庸没齿者,其咎在于无定见,而用治之不精也。使其病浅,犹无大害,若安危在举动之间,即用药虽善,若无胆量勇敢而药不及病,亦犹杯水车薪,尚恐弗济,矧可以执两端而药有妄投者,其害又将何如?耽误民生,皆此辈也,任医者不可不深察焉。
故凡施治之要,必须精一不杂,斯为至善。与其制补以消,孰若少用纯补,以渐而进之为愈也。与其制攻以补,孰若微用纯攻自一而再之为愈也。故用补之法,贵乎先轻后重,务在成功;用攻之法,必须先缓后峻,及病则已。若用制不精,则补不可以治虚,攻不可以去实,鲜有不误人者矣。
余为是言,知必有以为迂阔而讥之者,曰∶古人用药每多至一二十味,何为精一?岂古人之不尔若耶?是不知相制相使之妙者也,是执一不通而不知东垣之法者也。余曰∶夫相制者,制其毒也。譬欲用人奇异之才,而又虑其太过之害,故必预有以防其微,总欲得其中而已。然此特遇不得已之势,间一有之,初未有以显见寻常之法用得其贤,而复又自掣其肘者也。至若相佐相使,则恐其独力难成,而用以助之者,亦非为欲进退牵制而自相矛盾者也。
观仲景之方,精简不杂,至多不过数味。圣贤之心,自可概见。若必不得已而用行中之补,补中之行,是亦势所当然。如《伤寒论》之小柴胡汤以人参、柴胡并用,陶氏之黄龙汤以大黄、人参并用,此正精专妙处,非若今医之混用也。能悟此理,方是真见中活泼工夫。至若东垣之方,有十余味及二十余味者,此其用多之道,诚自有意。学人欲效其法,必须总会其一方之味,总计其一方之性。如某者多,某者少,某者为专主,某者为佐使,合其气用,自成一局之性,使能会其一局之意,斯得东垣之心矣。若欲见头治头,见脚治脚,甚有执其三四端而一概混用,以冀夫侥幸者,尚敢曰我学东垣者哉。虽然,东垣之法非不善也,然余则宁师仲景,不敢宗东垣者,正恐未得其清,先得其隘,其失者岂止一方剂也哉,明者宜辩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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