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음병 강요-2
(4)수토류실水土流失-물과 흙이 쓸려 나간다.
수토합덕水土合德은 확실히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흙 속에 물이 없으면 바짝 말라버린흙인데 어떻게 만물을 키우고 기를 수 있겠는가? 이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면 물에 흙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래에서는 이 문제를 토론해 보겠다.
요즘 신문, 방송에서 매우 많이 등장하는 화제가 바로 수토류실水土流失이다. 중국에서는 해마다 엄청난 토지가 류실되고 있고 사막화되고 있으며 또 이런 류실과 사막화가 해마다 점점 가속화하고 있다. 토지는 왜 류실되는 것일까? 산림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50 년대로 부터 정부에서는 식량증산정책을 실시하면서 식량증산을 정책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엄청난 삼림森林이 베어졌고, 풀밭이나 거친 산들이 모두 논밭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풀밭이 갈아엎어지고 나무들이 줄어들었다. 나무가 줄어드니 흙을 잡아둘 수 없어 토지가 류실되고 사막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행의 상생상극을 가볍게보면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목木이 극토克土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소요산逍遥散,시호소간산柴胡疏肝散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렇다면 겨우 사람의 병을 치료할 뿐이다. 여러분들이라면 여기에서 토지류실과 사막화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층면层面까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의치국上医治国”이다.
토지가 뭉텅 뭉텅 류실되고, 성큼성큼 사막화되어 오자 비로소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면서 논밭에다 다시 나무를 심을 생각을 했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로 이미 늦어버렸다. 식생이 파괴된 것은 도로 “퇴경환림退耕还林”할 수 있겠지만, 석유石油가 고갈되어 버렸는데, 이미 채취한 것을 도로 돌릴수 있겠는가?
토목土木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여 외국에 나가본 사람, 특히 미국, 일본, 유럽에 가 봤던 사람들은 모두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그곳의 산림은 잘 보존되어 있고 흙이 있는 곳이라면 풀과 나무가 심어져 있어 구두를 닦으면 한 달 동안 깨끗하다. 그런데 우리 여기에서 가능한가? 오전에 닦았는데도 오후가 되면 벌써 지저분하다. 왜 그런 것일까? 식물植物들이 너무 없으니 흙이 날아오르지 않을 수 없다. 구두가 더러워지는 것은 별 일 아니지만 이는 식물환경이 파괴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토지류실문제는 참으로 큰 문제이다. 토지가 흘러 나가는 것이 얼핏보면 흙의 문제인 것 같지만 흙이 왜 안좋아지겠는가? 그 뿌리는 나무 곧 식물환경에 있다. 목이 극토하지 못하면 토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현재 늘 수토류실水土流失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흙이 유실되는 것은 나무 때문으로 그 뿌리가 나무 쪽에 있었다. 물의 유실은 어떤가? 당연히 흙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흙은 만물을 자라게 하고 길러주며 만물을 받아들여 갈무린다. 흙이 받아들여 갈무리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었일까? 바로 물을 갈무리는 것이다. 흙이 물을 갈무리지 못하면 물은 자연히 빠져 나가버린다.
토장수土藏水의 기능을 물을 가두어 놓는 물 곳간으로서의 축수蓄水기능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겨우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 장수藏水하는 기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전에는 비가 많이 내려도 지금처럼 쉽게 물이 차오르지는 않는다. 요즘은 비가 조금만 많이 오고, 조금만 오래 와도 물이 길거리까지 넘쳐흐른다. 왜 그런 것일까? 전에는 흙의 기능이 비교적 좋아서 장수藏水가 잘 되었기 때문에 비가 좀 내려도 이 흙이 흡수하여 처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그 기능에도 한도가 있어 처리할 수 없다. 다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요즘의 흙은 그렇지 못해 비가 내려도 흡수, 처리할 수 없으므로 모여서 거리로 흘러가고 강하江河로 흘러든다. 그래서 현재 매우 엄중한 문제는 흙의 기능문제이다. 흙의 기능을 돋우고 지킬 방법이 없으므로 물이 흘러나가 버리고, 이 때문에 다시 흙이 쓸려나가는 악순환을 이룬다.
토土의 질량质量이 떨어지고, 토의 기능을 보증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식물환경과 매우 큰 관계가 있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이다. 식물은 곧 목木의 요인인데 토의 기능에 왜 이렇게 큰 작용을 하는 것일까? 우리는 토土의 특성 중에서 매우 중요한 특성을 보아야 한다. 이 특성은 곤괘坤卦를 살펴보면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삼자경三字经》가운데 하나의 괘효가卦爻歌가 있는데 그것은 "건삼련乾三连,곤육단坤六断,진앙우震仰盂,간복완艮覆碗,리중허离中虚,감중만坎中满,태상결兑上缺,손하단巽下断."이다. 건삼련乾三连은 건괘의 세 효가 모두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곤괘坤卦는 어떤가? 이는 육단六断으로 효爻마다 중간이 끊겨, 보면 빈 것같고 잘 통하는 것같다. 그래서 “곤육단坤六断”이 만드는 이 허성虚性과 통투성通透性이 토土가 가진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토土가 잘 통투通透하지 못하고, 부드럽고 폭신하지 않다면 이 토土는 어떤 토일까? 그 흙은 사토死土인 것이니, 죽은 흙이라면 당연히 그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없다.
농촌农村출신이거나 농민이 땅을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매우 잘 알 수 밖에 없다. 농사꾼이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가는 것은 흙을 부풀려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왜 흙을 느슨하게 해야 할까? 그것은 곤지坤地의 허성과 통투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다. 흙은 꽉꽉 눌리지 않고 푸슬푸슬해야 한다. 식물이 잘 자라는 지방의 흙은 어떠하던가? 모두 푸슬푸슬하다. 그런데 불모지의 땅은 돌처럼 딱딱하여 토성土性을 잃고 있다. 토성을 잃으면 먼저 수장收藏할 수 없게 되는데, 수장할 수 없으면 어떻게 생장生长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흙의 이런 푸슬푸슬한 상태는 매우 중요한데, 푸슬푸슬해야 갈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지만 화분 몇 개는 키워봤을 것이다. 화분의 흙을 오랜동안 뒤집어주지 않아 딱딱해졌을 때는 아무리 흙이 말라 있어도 물을 주면 옆으로 흘러버리고 뿌리까지 닿지 못한다. 이 때 농민이라면 흙이 물을 “흘吃”-먹다-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흙이 딱딱해져 통투通透하지 못하고 포실포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물을 머금을 -“흘吃”水-수 있겠는가? 그래서 농민들은 오랜 가뭄 뒤에 물을 줄 때는 먼저 땅을 갈아준다. 그것은 바로 흙이 흘수吃水하고 장수藏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이다.
청화清华대학에는 두 마디의 매우 유명한 교훈校训이 있는데 하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고 하나는 후덕재물厚德载物이다. 앞 마디는 건괘乾卦에서 나온 말이고, 뒷마디는 곤괘坤卦에서 가져 왔다. 교훈 속에 이미 천지를 포함하고 있으니 청화가 이로써 일류 대학이 될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곤괘의 “후덕재물厚德载物”은 두 방면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하나는 바로 “지재곤원至哉坤元,만물자생万物资生”이다. 곤원坤元에서 “만물자생万物资生”하지 않는가? 확실히 만물이 이로써 생긴다. 우리가 먹고 쓰는 모든 것이 곤원坤元으로 부터 온다. 이것이 곤원이 만물을 생양生养하는 한 측면이다. 다만 곤원의 “만물자생万物资生”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면인 “곤후재물坤厚载物”이 있어야 한다. 이 한 측면이 바로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장납藏纳하는 품성이다. 장납藏纳은 들이는 것이고, 자생资生은 내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드나듦은 매우 특별하다. 지금 모두들 쓸 모 없어진 것들은 땅에다 버리고, 대소변같이 더러운 것들도 땅에 버리는데도 싫어하지 않고 묵묵히 이런 쓰레기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런 쓰레기들을 받아들인 뒤 우리에게 우리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내놓는다. 곤坤은 바로 이렇게 “이덕보원以德报怨”하므로 공자는 곤을 “덕합무강德合无疆”-만물과 더불어 같이 덕행을 누리니 땅에는 구별이 없다.-이라 칭찬하였다.
곤坤이 후덕재물厚德载物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前提 조건이 필요한 데 바로 곤坤이 음유阴柔、소완疏缓、송활松活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문제는 식물환경이 나빠진 것 외에도 도시건설, 교통건설 및 기타 지원건설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건설해나가는데 어떻게 그 많은 땅들이 곤성坤性을 지킬 수 있겠는가? 한 쪽에서는 시멘트 철근으로 다져나가고, 한 쪽에서는 부수고 있어 마치 동장철벽처럼 변해가는데 어디에 조금의 곤성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곤성이 없는데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물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래서 빗물이 땅에 닿자마자 흘러가 버리니 이것이 물의 유실이다. 빗물이 땅 속에 모이면 쓸 모가 아주 많다. 나무는 무엇으로 나고 자라는가? 풀은 또 어떻게 나고 자라는가? 바로 이 물을 먹고 나고 자란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보면 지금 작물을 심을 때 뿌리는 비료는 거의 대부분 화학비료이다. 화학비료를 쓰면 어떻게 되나? 몇 년 혹 몇 십년 동안은 좋을 수 있다. 작물도 잘 자라 퇴비를 썼을 때보다 수확량도 많다. 그렇지만 몇 십년이 지난 뒤로는 어떻게 될까? 땅의 유기질이 부족해져서 비가 오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흙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흙은 유기질有机质이어야 하는데 오랜 동안 무기질 비료를 써 왔기 때문에 유기질에서 무기질로 천천히 바뀐 것이다. 유기인 곤토가 무기로 바뀌어 곤토의 효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토坤土가 받아들이고 갈무릴 방법이 없어진다. 예전에는 비가 내렸을 때 한껏 빨아들였던 흙이 지금은 물을 대개 그냥 흘려버린다.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것은 만물의 생장에 너무 큰 역할을 하므로 그냥 강으로 흘려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이 크나큰 의의가 있다. 모두들 앞에서 들었던 용맥龙脉을 아지도 기억하는가? 용맥과 생태生态의 관계는 너무 중대하다. 흙이 빨아들인 빗물의 매우 중요한 하나의 역할이 바로 이 용맥을 길러내는 것이다. 용맥이 잘 가꾸어지면 생기生气가 자연스레 왕성해져 우거진 숲을 가진 푸른 산을 만든다.
현재 여러 요인들이 곤토의 부드럽고 포근한 성질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런 부드럽고 포근했던 성질이 영향을 받고나면 더는 물을 갈무리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나무가 우거지지 못하게 되며, 다시 곤토를 딱딱하게 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위에서는 자연방면에서 본 것이지만 사람은 자연에 영향을 받게 되므로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곤토가 영향을 받으면 그에 대응하는 인류는 어떨까? 건남乾男、곤녀坤女이니 인류의 여성에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여성에 일어난 숱한 변화들은 이와 상관이 있다.
곤성坤性은 감추는 것으로 여성들의 의복을 보면 무엇이 감추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긴 치마가 땅에 끌리어 발이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다. 웃을 때 조차 이를 드러내지 않게 감추는데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요즘 여성은 어떠한가?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조사에는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 그저 큰 길에 나가 한 켠에 서 있으면서 살펴보면 된다. 눈 앞에 지나가는 남녀를 나누어 옷 밖에 내놓은 면적을 따로 셈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여성이 아직 감추려 하는가? 감추려 하자 않는다! 남자가 오히려 소매와 바지가 길고 여자는 소매도 짧고 치마길이도 짧은데 심지어는 탱크탑을 입어 보일 데는 다 보여주고 보이지 않아야 될 곳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다.비록 이 현상이 시대의 조류라지만 사람과 자연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으므로 곤토坤土의 성질이 바뀌어 버리고 식물환경이 바뀌어 진 것이 큰 요인이 아니라고 하기가 어렵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부락끼리 모여 살고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살다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언제나 한 곳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래야 계속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어느 정도 쓴 뒤 더 이상 포실포실하지 않으면 쉬면서 회복하게 하려고 옮겨 갔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만 주의를 게을리해도 자연의 여러 요인들에 영향을 미쳐 마침내 사람들은 자연의 보복을 받고 만다.
앞에서 우리는 사람의 옷과 성정性情조차 자연에게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리生理 방면은 어떨까? 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요즘은 위축성위염萎缩性胃炎이 갈수록 늘고 있는데 이렇게 한 질병이 흔해지는 것도 환경의 변화때문일까? 당연하다. 위胃는 오행에서 토土인데 그 중에서 양토阳土로 비교적 바깥 층에 있는 흙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흙이 폭신폭신하고 포슬포슬해야 흙의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위胃가 양토라면 위 표면의 점막黏膜과 선체腺体도 이런 곤유坤柔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많은 요인들이 곤유坤柔에 영향을 미치고 기본적으로 건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람에 곤토坤土의 유효한 면적이 갈수록 “위축萎缩”되고 있다. 사람은 천지의 기를 받아 나고, 사시四时의 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자연이 바뀌니 어떻게 위축성 위염이 많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과 자연은 서로 기로써 이어져 있어 곤계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든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한 사람의 한의사로서 특별히 21세기의 한의사로 보면 이 작용이 사람의 생리방면에만 한정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시야를 좀 더 넓힐 수 있다. 여러분이 이런 이론으로 지구를 보고, 우주를 본다면 많은 문제들이 매우 분명해진다. 이런 이념으로 환경을 인식하고 환경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치본治本이다. 현재도 환경을 다스리자고 하면서 숱한 조치들을 늘어놓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표를 다스리고 거죽을 다스려 근본을 다스리는 방법은 아니다. 미국은 온실가스 배출량 삭감에 조차 반대하면서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가? 현재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략을 내놓고 있더라도, 만약 이런 전략이 실제로 시행할 때 청교도 전통으로 돌이켜 살펴보지 않고, 전통적인 이념으로 감독하지 않는다면 이 조치는 말만 내놓은 것 뿐으로 끝내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한의사로서 손을 좀더 현실로 뻗을 수 있는데, 왜 현대에 대해서 이것저것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수토합덕으로부터 수토류실로 일어나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이어서 생각하면서 느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