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만산 상한론 강의

제1강 상한론의 저자-4

臥嘗 齋 2019. 2. 10. 22:06

1182년 금金 나라 사람 유완소劉完素는 그가 쓴 《소문현기원병식素問玄機原病式》이란 책 속에서 “중경자, 아성야仲景者,亞聖也”라고 명확히 언급하였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성聖”과 관련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의성醫聖”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성인에 버금간다고 하였습니다. “아성亞聖”이란 성인에 버금간다는 말입니다. 그 뒤 1526년에 이르러 이렴李濂이 《의사醫史》를 썼는데, 거기에서 중경을 “논자추위의중아성論者推爲醫中亞聖”-아성이라고 추존推尊하는 사람도 있다-이라 하였는데, 이는 명 대 1526년이 되어서도 아직 중경을 직접 의성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직접 중경을 의성이라 한 것은 서기1589년에 상한연구의 대가이자 착간파錯簡派의 창도인創導人인 방유집方有執이 《상한론조변傷寒論條辨》을 쓰면서 이 책 속에서 “……칭중경왈성……稱仲景曰聖”-중경을 성이라고 한다.-이라 한 것인데, 그 이후로 의가들의 저작속에서 중경을 “성聖”으로 부른 것이 비로소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중경의 묘비는 어느 때에 발견되었는가 하면 1632년에 발견되었다고 조금전에 말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의학계에서 장중경을 성이라고 했는지를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연히 1589년 방유집의 상한론조변에서 부터 비로소 중경을 성이라고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묘비는 1632년에 발견되어 방유집의 상한론조변이 간행된 이후에 발견된 것입니다. 매우 재밌는 것은 중경묘비가 발견된 이 과정도 아주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청나라 강희康熙 년간에 서중가徐中可가 《금궤요략논주金匱要略論注》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 매우 수상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장중경령리기張仲景靈異記”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명 대에 풍응오馮應鰲라는 선비가 발열오한하는 병을 얻어 숨만 겨우 붙어있을 뿐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꿈속에서 누런 옷을 입고 금 모자를 쓴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의 전신을 쓰다듬자 금방 온 몸의 뼈마디가 모두 시원해졌습니다. 그래서 꿈 속이지만 신인에게 누구시냐고 물었는데 자기는 남양 한 장사태수 장중경南陽漢長沙太守張仲景이라고 했답니다. 그 신인이 스스로 의성이라고는 안했습니다. 그렇죠? “내가 오늘 당신의 병을 치료한 것은 내게 비교적 곤란한 사정이 생겨 당신이 도와줬으면 해서요. 이 남양성 동쪽 4리되는 곳에 사당이 있는데 그 뒤로 77걸음 떨어진 곳이 바로 내 무덤으로 몇 년이 지난 뒤 내 무더위로 우물을 팔려고 할 것이오. 이런 사정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이니 그 때가 되면 당신이 거기 가서 무덤 위로 우물파는 것을 멈추게 하고 내 무덤을 다시 새로이 고쳐주시오.” 그 후 깨어나니 땀이 쭉 나면서 오한이 가시면서 열도 내였습니다. 그는 줄곧 장중경이 한 꿈 속의 부탁을 잊지 않고 있다가 몇년 뒤,실제로는 4년이 지난 뒤 그가 남양성南陽城의 동쪽에 가 보니 과연 채소밭에서 농민이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석비하나를 파내고 있있는데, 거기에 “한 장사태수 의성 장중경묘漢長沙太守醫聖張仲景墓”라고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는 이 묘비가 명 대 사람이 세운 것이며 단지 신비스럽게 보이려고 이야기를 지어 냈을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 당, 송시대에는 장중경을 “의성醫聖”이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으로 직접 의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 말明末1589년에 이르러 방유집의 《상한론조변傷寒論條辨》에서 비로소 중경을 의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묘비에 직접 “한 장사태수 의성 장중경묘”라고 쓰여있는것으로 보면 당연히 명조 말년의 사람이 세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묘비 주위의 도식圖式이나, 화문花紋이 진말 남북조晋末南北朝의 그런 풍격風格으로 새겨졌을까요? 현재도 사람들이 옛 사람을 위해 묘비를 세우거나 혹은 그를 위한 기념당을 세울 때 그 사람이 살던 시대의 물건들을 모방하려고 합니다. 우리 북경중의약대학도서관北京中醫藥大學圖書館 문 앞에 장중경의 동상이 서 있는데, 장중경 동상 주위를 한백옥漢白玉으로 난간欄杆을 두르고 그 난간에 무수한 그림들을 새겨 놓았는데, 이 그림은 한 대 고묘漢代古墓에서 고른 것입니다. 만일 앞으로 몇 천년이 지나 사람들이 중의학원의 옛터에 와서 고고학적인 조사를 하게 될 때, '아아 여기 장중경의 동상이 있네' 하다가 동상 주위의 난간에 새긴 그림이 한대의 어느 때의 고묘 화문과 같다는 것을 알아내었다고 해서 이 동상을 한대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앞 시대의 사람의, 옛 사람의 동상을 만들거나, 묘비를 세우면서 묘비의 이런 장식 화문에 그 사람 당시의 방식을 모방해 새기는 것은 매우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비좌에 새겨진 “함화오년咸和五年”은 어찌된 일일까요? 아마도 후세 사람이 이 비를 세울 때 고대의 비좌碑座 하나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이 비석의 비좌를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추측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오늘 강의한 이 사정은 중경이 의학계에 끼친 공헌을 평가하자는 것으로 결코 그가 장사태수를 했는지 아닌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의학계에 끼친 공헌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깨우쳐주려는 것은 송 대 국가교정의서국의 상한론서에 당 대 감백종의 “거효렴, 관지장사태수擧孝廉,官至長沙太守”란 말을 인용한 뒤부터 의학계에서는 “장사長沙”를 중경의 저작著作이나, 중경 바로 그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써 왔다는 것입니다. 예로 원 대 여리吕履가 《장사용약십석長沙用藥十釋》이란 책을 썼는데 이 장사용약십석에 “장사長沙”란 말을 넣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이 장중경의 용약규칙을 여리가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 대 황원어黄元御의 저서 중에 《장사약해長沙藥解》라는 책이 있는데 이 또한 장중경의 용약규율用藥規律을 해석한 책인 것입니다.
청 대 진수원陳修園이 지은 《장사방가괄長沙方歌括》도 만약 장중경이 장사태수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음을 모른다면 책 제목에서의 장사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이 장사방가괄은 상한론중의 방가方歌의 가결歌訣인 것이 틀림없는데, 왜 장사방가괄이라 했을까요? 중경이 장사태수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역사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장사는 장중경의 저서를 가리킵니다. 일본인까지도 장사증회《長沙證𣾀》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장사증회라는 책은 상한론 중의 증후를 귀류歸類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렇게 한의학계의 수많은 저서 속에 보이는 장사는 중경 저서의 지시대명사이거나, 중경 본인을 지칭한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정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장중경의 저작은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열 여섯 권으로 이 이름은 상한잡병론의 서문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인데, 《상한졸병론伤寒卒病論》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잡병론雜病論”인지 “졸병론卒病論”인지 현재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열 여섯 권의 저작은 한 대 당시에는 각판인행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전란戰亂으로 인해 금방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만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이라는 두 저작으로 나누어져 버렸는데, 언제 어떻게 두 책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다음 시간에 따로 토론하겠습니다. 다만 상한론에 대해서, 중경의 저작에 대해서 《진서晋書》、《당서唐書》와 같은 역대의 사서에서 기록이 다릅니다. 어디에서는 《장중경요방張仲景要方》이라 했고, 어디에서는 《중경약방仲景藥方》이라 했으며, 《장중경상한론張仲景傷寒論》이라 한 곳도 있는데 왜 책이름이 다를까요? 왜냐하면 그 시대가 출판물은 없고 모든 책을 베껴서 보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베낀 책이라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별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출판물에 책 이름이 고정되어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시대에는 출판물은 없고 모두 베낀 것이기 때문에 책이름을 어떻게 써 놓더라도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중경의 제자에 관해서는 지방지地方志에 제법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두도杜度는 그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매우 총명했으며 당시에 장중경을 따라다니며 배워 의료기술로도 아주 명성이 높았습니다. 또 위신衛汛이라는 사람은 장고張杲의 의설醫說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또한 장중경의 학생으로 적지 않은 저술이 있다고 하나 모두 실전되었습니다. 여가석余嘉錫선생은 《사고전서변증四庫全書辨證》에서 왕숙화王叔和도 장중경이 직접 가르친 제자라고 고증하고 있습니다. 왕숙화가 장중경의 제자라면 그가 직접 스승의 저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의 상한잡병론을 정리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장중경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장중경은 한의 임상의학의 기초를 놓은 분이어서 후세의 우리들에게 존경받아 현재까지도 남양의 의성사醫聖祠가 해마다 수리됩니다. 사람들이 그를 기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의성이라 불리고 있는데, 후세에 의성이라 불리는 것은 한의학계에서 한의학의 학술발전에 아주 중요한 기초를 다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말 여러 사람들이 개체화치료방안과 군체화치료방안 중 어느 것이 더 선진이고 우수한지에 대해 토론할 때 모두들 개체화치료방안이 가장 선진되고, 우수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는데, 이런 방안을 창립한 사람이 바로 장중경인 것입니다.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